한국 땅을 밟기 위한 4년7개월간의 기다림은 끝내 물거품이 됐다. ‘조선적’ 재일동포 3세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양교육센터 정영환(32) 준교수가 언제 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2009년 4월, 정 교수는 서울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사카총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2009년 12월 서울행정법원은 “국가의 안전 보장을 해칠 명백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가 부당하다고 선고한다. 그러나 이듬해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자국민 추방하는 것과 다름없어”대법원에 상고한 지 3년이 훌쩍 넘은 지난 12월12일, 대법원 제3부(주심 박보영)는 정 교수가 오사카총영사관 총영사의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 삼고심에서 정부 쪽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조선적 재일동포는 여행증명서를 소지해야 한국에 왕래할 수 있다”며 “과거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산하 단체 일원으로 방북하고, 방한 당시 반국가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부의장을 만난 점 등을 고려해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를 취소한 것은 정부의 재량권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정부가 조선적 재일동포의 한국 입국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법무부의 경우 조선적 재일동포들도 한국 국적자로 본다는 입장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문제되는 행위를 한 상황도 아니고 과거에 조총련 활동을 했다거나 누군가를 만났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건 자국 국민을 추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1947년 일본 정부는 일본의 호적에 오르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에게서 ‘일본인’이라는 법적 지위를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지난 70년 동안 일본을 포함해 남북한 어느 나라의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사실상 ‘무국적자’로 살아왔다. 이러한 조선적 수는 5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일본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 한국으로부터도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외국으로 나갈 때 일본 법무성이 발행하는 ‘재입국 허가서’라는 서류를 지녀야 한다. 이는 거주국인 일본에 다시 입국할 수 있는 서류일 뿐이다. 외국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일본 정부는 조선적 재일동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지구촌동포연대(KIN) 배덕호 대표는 대법원 선고에 대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직면해왔던 ‘조선적’ 재일동포의 지난한 역사와 현실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라며 “여행증명서 발급을 원하는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주일 한국 영사관으로부터 ‘국적’ 변경을 강요받는 현실을 눈감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인들은 비자 없이도 오는데남북 분단 현실에서 남이든 북이든 어느 쪽 국적도 택하지 않는 ‘조선적’ 재일동포는, 한국 사회에 적대적인 사람들로 간주돼왔다. 대법원 선고에도 이러한 시선이 녹아 있다. 일제 식민지 지배, 분단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의 비극이 여전히 조선적 재일동포의 삶을 옥죄는 것이다.
“아무 할 말이 없어요.” 대법원 선고 결과를 전해들은 정 교수가 허무한 듯 한마디를 전했다. 그에겐 그렇게 멀고도 먼 한국은, 일본인들에겐 비자를 받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는 나라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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