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배기 수닌(가명)의 고향은 부산이다. 아빠와 엄마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아빠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엄마는 비전문취업비자(E-9)로 입국했지만, 비자 유효기간은 이미 만료됐다. 그러니까 수닌의 부모는 한국 내 불법체류(미등록) 외국인이다. 두 사람은 4년 전에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올리거나 별도의 혼인신고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11년 수닌이 태어났다. 아이는 현재 한국에도, 베트남에도 ‘없는’ 아이다. 아직 그 어느 나라에도 출생등록이 돼 있지 않다. 현행법상 수닌은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주한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출생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체류 상태가 불안정한 부모는 자국 대사관을 쉽게 찾아가지 못한다. 서류에 이름을 올린다 하더라도, 아이는 부모의 ‘불법체류’ 신분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 터다.
신분 확인 안 된다며 치료 거부한 병원들사실, 부모는 아이의 출생신고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다. 3.8kg으로 태어난 수닌은 생후 6개월부터 앓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는 아이가 감기에 걸린 줄만 알았다.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여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외국인 자녀를 선뜻 치료해주겠다는 병원은 없었다. 아이를 입원시키려면 보증금 2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닌의 병색은 더욱 깊어져갔다. 결국 응급차에 실려 또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응급실에서 병원 사람들한테 무릎을 꿇고 치료해달라며 호소하기도 했다.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친척과 결혼한 한국인이 아이의 보호자로 나서 입원할 수 있었다. 수닌이 앓고 있는 병은 ‘만성 폐색성 기관지염’. 만성 질환이라 지금도 간혹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아빠·엄마는 주말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한다. 미등록 외국인은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아픈 수닌도 마찬가지다. 아이 간병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베트남 고향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지만, 병이 있는 수닌을 먼 곳까지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을 벌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하다.
수닌처럼 이 땅에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사람이 사회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적 기관으로부터 그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출생등록’이다. 출생을 기록하지 않으면, 신분 확인도 불가능하며 국적도 불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출생등록은 권리를 보호하고 의무를 부과하는 출발점이다. 특히 만 18살 미만 아동에게는 교육·의료 등 성장하면서 필요한 사회서비스에 접근하는 발판이다.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교육에서 배제되거나 불법 인신매매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출생등록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수가 대략 얼마인지는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2012년 군포 ‘아시아의 창’ 등 경기도 지역 단체들이 펴낸 ‘이주노동자 미취학 자녀 양육환경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 자녀 111명 중 출생신고가 아예 안 된 아이는 19명(17.1%)이었다. ‘아시안프렌즈’ 김준식 이사장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아이들을 비롯해 한국에서 권리 보장을 받고 있지 못한 아이들은 1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현재 19살 이하 미등록 외국인은 5681명이다.
출생 등록 조건으로 귀국 종용하기도소롱고(가명)는 한국에서 살던 8년 동안 ‘없는’ 존재였다. 몽골 출신인 아이의 부모는 10년 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엄마는 소롱고를 낳았을 때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아이가 커갈수록 신분증조차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출생신고를 하고 여권을 받을 생각도 했다. 그러나 대사관이 출생신고를 조건으로 불법체류를 중단하고 귀국하도록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남편이 사고로 숨지면서 경제적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한국에 오기 위해 진 빚을 다 갚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돈을 좀더 벌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여권 없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엄마는 아이가 언젠가 한국 국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했다. 몽골말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고 다른 아이들과 외모도 비슷했다. 엄마가 불법체류 단속에 걸리면서 소롱고의 한국 생활도 끝났다. 아이의 거취를 두고 고민하던 엄마는 몽골대사관에 벌금을 내고 뒤늦게 출생신고를 해 아이의 여권을 받았다. 8년 동안 방치돼 있던 소롱고는, 흔적도 없이 올해 초 이 땅을 떠났다.
국제아동권리기관 세이브더칠드런은 최근 펴낸 연구보고서 ‘이주배경 아동의 출생등록’을 통해 “특히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갖지 못한 부모들의 경우, 자녀 출생등록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출신국 대사관들이 혼인·출생 신고를 조건으로 귀국을 종용하거나 까다로운 서류,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번 보고서의 책임연구원인 김철효(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수료)씨는 “이러한 현실은 한국 정부가 고용허가제를 통한 이주노동자 송출국가에 ‘불법 체류’를 줄이라는 압박을 가하는 상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2012년 고용노동부는 불법체류율이 높은 베트남을 2013년 외국인 고용허가제 송출 국가에서 제외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 응웬(가명)은 한국에서 홀로 아이를 낳았다. 일정한 기간 내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비자가 취소될 처지였다. 낯선 땅에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만이라도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로 보낼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대사관에서 거쳐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아이를 ‘고아’로 둔갑시켰다. 보육원에 가게 된 아이는 한국 이름과 국적을 갖게 됐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를 볼 수 없다.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면 강제 추방을 당할지 모른다. 국제결혼이 파탄 나는 과정에서 혼외 자녀가 태어나는 경우 출생등록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국인과 결혼한 한 베트남 여성은 폭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에게서 도망쳐 미등록 외국인이 됐다. 이 여성은 한국에서 베트남 국적 남성을 만나 아이를 낳았는데, 자국 대사관에선 이들의 혼인신고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갖고 있는 난민이나 난민신청자도 출생등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출신국 대사관 접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 인권이사회 권고도 있었지만이번 연구보고서가 주목한 현실은, 한국 정부가 유엔에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외국 국적 아동은 해당국 대사관을 통해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고 한 주장과 거리가 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등에서는 한국 정부에 ‘이주민·난민·무국적 자녀를 포함해, 대한민국에서 출생하는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출생등록을 도입해야 한다’고 권고해왔다. ‘보편적 출생등록’이란 부모의 법적 지위, 출생 지역, 출생 장소 등 어떤 조건과 관계없이 한 국가의 관할권 내 모든 아동의 출생을 등록하는 제도를 말한다. 특히 유엔 인권이사회는 2011년,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출생등록과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법 앞에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해 “출생등록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타이·이탈리아·네덜란드 등에서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은 영토 내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에게 국적을 부여하므로 자연스럽게 출생등록 문제도 해소되고 있다.
한국에서 아이가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면 그 내용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된다. 개인의 출생과 사망을 가족관계의 변동 사항으로 보고 이를 등록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기본적으로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외국인 부모가 한국 정부에 자녀의 출생 사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지방자치단체에선 가족관계등록부가 없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출생신고를 접수받기도 하는데, 출생신고를 접수장에 기록하고 신고 서류를 따로 보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출생신고를 하더라도 출생등록이 된 것은 아니다. 지자체에서 발급해주는 출생신고 수리증명서는, 서류를 접수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아이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 문서가 아니다.
당장, 한국 정부가 출생등록의 길을 열어준다고 해도 미등록 이주민이 이러한 제도를 이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출입국관리법상, 공무원은 강제퇴거 대상자를 발견하면 그 사실을 지체 없이 법무부 출입국관리기관에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 출생등록이 돼 있다 하더라도 부모에게서 불법체류자 신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들은 한국에서 성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해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10년간 살았던 17살 몽골 소년이 불법체류를 이유로 강제 퇴거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출생등록이 곧 기본권 보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장기간 거주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겐 한국 국적은커녕 체류권조차 없다. 이러한 까닭에 2006년부터 부모의 체류 자격과 상관없이 모든 이주아동에게 출생등록 및 체류자격 부여, 교육권 보장 등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져왔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추진 중인 ‘이주아동·청소년 권리보장 기본법’ 제정 운동이 대표적이다. 18대 국회 때 김동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이러한 내용의 법안을 대표발의했으나, 회기 종료로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현재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이 다시 한번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지금도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수닌의 부모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른 미등록 이주민이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한국을 떠날 수도, 더 머물 수도 있다. 미래가 어떠하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외면하고 방치하는 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닌은 한국 땅에서 한 뼘씩 자라고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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