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론은 상상력과 창의성,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 운영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새로운 시장,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정책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엮어서 세상을 리드해왔습니다. …기술 우위의 사업자를 선정하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해서, 저가 수주에 따른 소프트웨어 품질 저하와 낮은 임금 등의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근로계약서 없이 ‘IT 보도방’ 횡포꼬박 1년 전이다. 2012년 10월18일 아침,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동 새누리당사에서 ‘창조경제’라는 공약을 끄집어냈다. 정보기술(IT) 산업 비중이 국내총생산(2011년 기준 1235조원)의 27.2%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가 됐고 결국 미래창조과학부도 등장했다. 정부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일으켜세우겠다는 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별반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별반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IT 산업을 떠받치는 노동자들 사이에선 낮은 보수와 임금 체불, 극심한 노동강도 등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회에서는 IT 산업 노동자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안’(상자 기사 참조)도 발의됐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실은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박사팀에 의뢰해 IT 산업 노동자 14명의 표적집단 인터뷰(FGI·Focus Group Interview)를 진행한 ‘IT 노동자 근로실태조사 및 법·제도 개선방안’ 보고서를 만들었다. IT 산업 개선을 위한 정책 작업에 반영되는 이 보고서는 10월21일 공개된다. 은 IT 산업 노동자의 현실을 전하고자, 인터뷰 참가자 가운데 3명의 이야기를 지면에 재구성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창조경제 선언’ 1년을 맞는 국내 IT 산업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윤민기(38·가명)씨는 자바·오라클 프로그램 개발자다. 경력 10년차인 그는 한때 IT 업체 직원이었다. 대기업 사업을 맡는 중견업체로부터 하청을 받아 일하는 50명이 채 안 되는 규모의 회사였다. “심할 때는 서너 달, 적을 때는 한두 달 월급이 밀려 보험을 깨서 먹고살았습니다. 어릴 때는 회사에서 돈이 나온다 그러니까 믿다가 두세 달 밀리면서 힘들었습니다. 프리랜서는 보통 월급이 안 들어오면 계약 해지로 간주하고 바로 회사를 나가니까 (그때는) 그런 게 좋아 보였습니다. 정규직은 월급이 안 들어와도 못 나가니까.”
5년 전 그가 개인적으로 일을 따오는 ‘프리랜서’가 된 이유다. 돈벌이는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노동 환경은 그대로였다. “보통 근로계약서를 쓰는 곳이 없습니다. 사업자등록증이 있는 프리랜서가 있는 반면 저는 쉽게 얘기하면 그냥 아르바이트 개념입니다. 아르바이트들은 계약서를 잘 안 쓰잖아요. 계약을 이렇게 하다보니, 하도급 계약서예요. 바꿔달라고 해도 잘 안 바꿔줍니다.” 계약서가 없으니 임금 체불을 당하기도 일쑤다. “삼성(등 대기업이)이 돈을 5일에 주면 그 밑의 업체는 10일에 주고, 그 밑 업체는 15일, 20일에 줍니다. 그렇게 계속 밀리고, 밀리고…. 돈은 위에서 받았는데 자기네가 다른 데 쓰고 조금 있다 주겠다 이러는 거죠.”
“월급이 안 들어오면 떨려요”그를 포함한 ‘프리랜서 개발자’ 대부분은 일감을 얻기 위해 이른바 ‘IT보도방’을 찾는다. 술집 등 유흥업소에 접대부를 소개하는 ‘보도방’에 빗댄 말로 IT 업계의 ‘인력파견업체’를 뜻한다. 이들은 인터넷 구인 사이트를 통해 개발자를 확보해 도급업체에 파견한 뒤, 수수료 등 명목으로 보수(인건비)의 10~20%를 떼간다. 건설업계 일용직과 비슷한 구조다. “보도방은 저도 일 없고 그러면 바꿔요. 기존에 있던 업체가 제가 맘에 드는 조건을 제시하면 몰라도…. 저는 집 가까운 곳으로 연계를 합니다.”
그는 ‘IT보도방’을 거치면서 편법이 이뤄진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정규직만 고용해야 하는 정부 사업을 따온 대기업이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프리랜서인 그를 고용했다. 정규직 고용 여부를 파악한 정부의 확인을 받은 뒤, 다음달 계약이 해지되고 근로계약서를 돌려준 뒤, 원래대로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법은 좋게 돼 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편법으로 돌아갑니다.” 저가 입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낮은 가격에 사업을 따온 대기업이 인건비를 줄여 이윤을 남기기 위해 ‘IT보도방’과 짜고 실제 10명이 진행하는 계약을 5명에게 하청을 맡기는 일도 있었다.
그는 요즘도 월급날이 다가오면 가슴을 졸인다고 했다. “그날 오후 1~2시까지 월급이 안 들어오면 떨려요. 최소한 (계약의) 마지막 달 월급만큼은 잘 주고 법적으로 처리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또 야근할 때, 어쩔 수 없이 야근하더라도 수당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나름 전문직이라고 생각하는데 원치 않는 야근을 해야 합니다. 너무 불합리해요. 1시간당 5천원이라도 좋으니 보상이 있는 야근이어야 합니다.”
은행 전산거래 시스템을 만드는 정규직 개발자였던 강민주(26·가명)씨는 얼마 전 수술을 받았다. “주 80~100시간, 2년6개월 동안 총근무를 8천 시간 넘게 했어요. 하루에 15~20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평균 하루 쉬었어요. 못 쉬는 날도 있었고, 정말 피곤하면 이틀 쉬었습니다. 그렇게 일하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폐를 잘라내고 그때서야 알았죠. 내가 이렇게 일할 게 아니었는데 과로 때문에 병원에 왔구나. 주치의(산업의료 전문의)도 제 기록을 보고 과로 때문이라고 했어요.”
강씨는 당시 프로젝트가 운영되는 방식이 한마디로 ‘돌격 앞으로’였다고 표현했다. “프로젝트를 할 때 ‘이거 이런 식으로 해서 정상적으로 오픈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무슨 품질을 논하냐며 지금 우리가 소프트웨어 경연대회에 출품하냐고 껍데기만 만들라고 스스럼없이 말해요.” 그는 스마트뱅킹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협업 담당자들은 각종 버그 테스트 등을 생략한 채 급하게 사이트를 만들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 수많은 오류들을 어떻게 봉합하냐면 ‘보도화’라는 이름으로 2차 프로젝트를 발주합니다. 사실 이러면 업계의 사장님들은 좋죠. 문제는 이게 세금 낭비에 개발자들 혹사에….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서 이런 것들이 정말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관리·감독이나 통제를 하지 않는 SI(시스템 관리) 업계의 현실입니다.”
“먹이사슬 맨 아래에 있는 지렁이”과로로 얻은 병이었지만 이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근무시간을 인정받으려고 보니 출근 기록은 있는데 퇴근 기록은 없어서 제가 정리해서 회사에 제시했더니 ‘네가 거부했어야 했다’면서 뭐라고 하더라고요.” 야근·잔업 등이 잦은 탓에 IT 업계에서는 퇴근·야근 기록이 제대로 관리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는 우선 못 받은 야근수당을 받기 위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에서 야근수당을 인정받아야 초과근무 시간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없었다. “자회사는 노조가 없고 모회사 노조에 얘기할 것도 아니고, 찾아보니까 IT노조가 있어서 IT노조 홈페이지에 가보니 참여율이 저조하고….”
강씨는 현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소송 등을 겪으면서 “본인이 야근에 대해서 힘들고 문제가 생겼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이 사회는 바뀌지 않겠더라”고 말했다. “일단 야근을 노동부가 제재해야 하고요. 야근을 못하게 하자가 아니라 그에 맞는 임금을 지급하고 시키라는 거죠. 이렇게 되면 임금 1.5배를 주는 것보다 정상적으로 1년으로 해서 일 시키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더 낫거든요. 소프트웨어 품질에서도 차이가 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요. 테스트 등을 생략하지 않고 프로젝트 개발 방법론에 의해 절차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해야 하죠.”
“개발자들은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있는) 지렁이예요.”
20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회사 정규직·계약직 그리고 프리랜서까지 14년 동안 IT 업계에서 데이터베이스 관리 등을 하며 잔뼈가 굵은 손영민(35·가명)씨가 내린 진단은 그랬다. 그는 IT 업계가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다고 했다.
“2002~2004년 ‘닷컴 버블’이 한창 가라앉을 때 회사 사정이 안 좋으니까 임금 체불도 당해보고…. 딱 보면 ‘막장’이어서 일 못하겠더라고요. 담당자가 멱살잡이도 했지만 결국 그만뒀습니다. 또 다른 곳을 골랐는데 거기서도 또 멱살을 잡혔습니다. 원래 3개월을 계약했는데 제가 진짜 열심히 해서 (프로젝트를) 1개월20일 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잘하니까 더 빨리 잘리더라고요. ‘이번주까지 일하고 집에서 매뉴얼을 작성해서 보내라, 아니면 임금을 주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지치더라고요.”
정규직으로 옮긴 새 직장에서도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받기가 쉽지 않았다. “‘파견을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갔는데, 이 바닥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저를 아무 데나 막 보냈어요. 제가 세무 일을 많이 했는데 행정안전부에 세무 일을 하러 가서 한 달에 600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병도 나고…. 진짜 일을 밀어냅니다. 저희가 ‘병’이었는데, ‘을’ 회사에서 우유 밀어내기를 하듯이 일을 막 밀어냅니다. 자기네가 할 일도 밀어내고 우리 일도 해야 하고….”
회사가 따오는 사업에 따라 바뀌는 불안한 고용 상황도 문제였다. 손씨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이 25명 안팎이었다. 15억원 규모의 공공기관 사업을 따오면서 업무가 쏟아졌다. “일이 너무 크다보니 제안서도 제가 작성하고, 개발도 해야 하고, 출장도 가야 하고, 일 벌여놓은 것, 일 터진 것 수습해야 하고, 신입들 데리고 오면 이익을 얻으려고 박아넣거든요. 한 달에 300만원으로 데려오면 신입에게 120만원을 주고 250만원은 회사가 갖고 신입 교육도 해야 하고. 이러다가 제가 필요 없어지면 매몰차게 내쫓더라고요.” 그렇게 그는 본의 아니게 프리랜서가 됐다.
“이 단계 지나면 대한민국 IT의 끝”손씨는 “재주는 곰이 구르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 상황이 IT 산업의 위기를 불러온다고 했다. 최근 개발자들이 모여 만든 IT협동조합에 대해 “개발자들이 어느 정도 모여서 돈이 되는 서비스를 마련해 개발자들의 복리후생 등을 마련하자는 것이지만, 근로계약서 등은 대기업이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IT 산업은) 벌써 허리와 발가락이 쪼그라들었어요. 가슴만 비대해져 있고. 이 단계가 지나면 대한민국 IT의 끝입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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