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4일 저녁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13주년 기념식에 류길재(54) 통일 부 장관이 참석했다. 통일부 장관의 참석은,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김하중 장관 이 후 5년 만이었다. 류 장관은 이날 연설에서 “새 정부는 6·15 선언을 포함해 7·4 공동성 명, 남북기본합의서, 10·4 선언 등 남북 간 의 합의를 존중한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합의 존중’ 의 사를 밝혔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인터넷매 체 칼럼에서 거의 막말 수준으 로 류 장관의 발언을 비난하고 나섰다. “아 무래도 류 장관이 정신이 나갔거나, 제정신 이 아니거나, 그렇지 않다면 실성이라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그는, 자신을 김대 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의 통일부 장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 신 같은 사람들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한 박 근혜 정부의 통일부 장관이 과거 김대중·노 무현 정부처럼 대북 포용정책을 수용하는 건 봐줄 수 없다는 반응으로 들린다.
포용정책 반대 진영에서 류 장관에 대한 비판이 나온 건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4월11일 오후 4시께 류길재 장관은 ‘통일부 장관 성명’을 발표하며, “개성공단 정상화는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이와 관련 북 측이 제기하는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당국은 대화의 장으로 나오길 바란다” 고 말했다. TV조선 출연 도중 이 내용을 중 계방송으로 접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생방송에서 즉각 류 장관을 비판했다. “개성 공단을 자꾸 남북 화해의 상징이라고 해요. 아닙니다. 우리가 뜯어먹히는 상징이죠. 북 은 일체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강탈하는 단 계로 들어갔잖아요. 우리가 몇조 투자한 것 을 공짜로 먹겠다는 단계로 들어간 것입니 다. 그런데 통일부 장관이 나와서 이렇게 희 미한 이야기를 하면 됩니까? 강력한 이야기 를 해야지요.”
사실 이날 성명 발표에서 류 장관은 ‘정부 차원의 공식 대화냐’는 질문을 받고 “대화를 제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 개 성공단 문제, 또 북한의 가중되는 위협적인 행동, 이런 모든 문제들을 대화를 통해 풀어 야 한다는 점을 대내외에 천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곧, 대화 제의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10여 분 뒤, TV조선 화면 아래에 는 ‘정부 고위 관계자 “북한에 대화 제의한 것 맞다”’라는 자막이 떴다. 진행자가 이에 대해 다시 질문하자, 조 대표는 류 장관에 대 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류길재라는 사람 이 미국 사람은 아니잖아요. 한국 사람(류 장관)의 이야기를 어떻게 한국 사람(정부 고 위 관계자)이 또 통역을 합니까? 저 사람(류 장관)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상황을 오 판했잖습니까?”
‘신뢰 조성 기본으로’와 ‘기본적 적대성’그러나 류길재 장관을 대북 포용론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6월,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였던 그는 포용노선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정부는 ‘햇 볕정책’이 북한의 내부 변화를 유인할 수 있 는 정책이라고 주장했지만, 남한의 그러한 공세적인 정책은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반 발과 위축으로 대응하도록 한다. …무조건 북한을 지원해야 하고 북한의 입장을 변호 하는 듯한 태도는 국내 갈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남한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류 장관이 이번 6·15 행사에서 김대중 정 부 시절의 6·15 선언과 노무현 정부 때의 10·4 선언을 거론한 것도, 포용론적 접근이 아니라 ‘기존 합의 존중’의 선상에서 나온 얘 기로 봐야 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1주 년이던 2009년 2월에 쓴 글에서, 당시 정부 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강조하면서 시 작된 6·15 및 10·4 선언의 인정 여부 논란이 정부가 범한 주요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이 명박 정부가 한 번도 6·15와 10·4를 불인정 하는 표현을 구사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전 임 정부의 성과와 합의를 도외시하는 것처 럼 보임으로써 무익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류 장관은 남북 간에 이뤄진 다양한 기존 합의가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이 진행된 바 있다는 것”의 증명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새로운 방안을 구상하는 것 은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불필요하다고 생 각한다. 신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으 로 돌아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게, 지금도 유 지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생각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 3월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남북의 모든 약속과 합 의를 존중하고, 그러한 합의에 담긴 상호 존 중의 정신 위에서 정책을 추진하겠다. 남북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형식에 연연하 지 않고 언제든 만나서 대화하겠다”고 말하 기도 했다. 그는 진정성 있는 의사소통, 한 반도 비핵화, 북한 개혁·개방 등을 목표로 내세우면서도, ‘북한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 며 위장해선 안 된다’거나 ‘남북관계는 기본 적으로 적대성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이 북 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다’ 등의 인식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
결국 ‘신뢰’가 우선돼야 한다는 한반도 신 뢰 프로세스, 곧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을 맡을 적임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불분명한 이유로 대통령직인수위원직을 사퇴한 최대석 이화 여대 교수와 더불어 통일부 장관감으로 주 목받았다.
하지만 류 장관과 청와대 사이엔 불협화 음이 존재한다. 앞서 “대화의 장으로 나오길 바란다”고 했던 4월11일 오후 성명에 대해, 류 장관은 현장에서 ‘대화 제의는 아니다’라 고 설명했다. 청와대 반응은 달랐다. 청와대 의 고위 인사는 일일이 언론사에 전화를 걸 어 “류 장관의 성명은 확실한 대화 제의”이 고 “박 대통령의 뜻”이라며 류 장관의 말을 뒤집었다. 저녁엔 급기야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반드시 가 동돼야 한다. 북한과는 대화를 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오늘 통일부 장관이 성명을 발 표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류 장관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자신에게 주어진 성명서만 읽은 ‘대독 장관’이 되고 말았다.
‘대독 장관’, 남북회담 ‘집행자’6월 초 남북회담을 추진하다 무산되는 과 정에서도 통일부나 류 장관의 목소리는 중 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실질적으로는 청 와대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는 게 전문가들 의 중론이다.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급’과 ‘격’ 을 둘러싼 이견 탓에 무산된 것이지만, 대북 협상의 경험과 전통이 있는 통일부가 그 정 도 차이를 예상 못했을 리 없고 통일부의 보 고를 받는 장관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관측이 다. 결국 통일부도 장관도 전문적 역량을 인 정받지 못하고, ‘집행자’ 구실만 요구됐다는 얘기다.
4월 중순 어느 주말 류 장관은 북한대학 원대학교 자신의 연구실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한 동료 교수가 그를 보고 ‘(장관은) 할 만하신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하고 싶은데, 잘돼야죠.” 그 문장에 는 본인의 의지와 당위가 담겼을 뿐, 현재와 미래는 없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참고 문헌
류길재, ‘단 한 번의 정상회담이 분단 구조를 깰 순 없다’, 2005년 6월호
류길재, ‘이명박 정부 시대의 남북관계: 변화의 모색과 전망’, 200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