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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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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씨는 안녕하시다



박성제 MBC 해직기자가 복직을 기다리며 만들어낸
‘세상 가장 아름답고 슬픈 스피커’ 쿠르베
등록 2013-06-19 11:22 수정 2020-05-02 04:27

“공기가 느껴진다.” 청음실에 앉았던 사람이 말한다. 인간의 노랫소리가 기계를 통과해왔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자연스럽다. 생생하고 맑다. 메탈을 크게 틀어도 소리가 죽죽 올라간다. 이제 갓 출발한 회사 PSJ디자인의 첫 스피커 ‘쿠르베’다.
평생 들을, WAF를 만족시키도록 예쁜…
PSJ디자인 대표는 ‘전 MBC 기자’ 박성제. 그냥 박 기자라고 하자. 대표 직함은 임시직, 출근 않을 뿐 기자다. 박 기자는 딱 1년 전인 2012년 6월20일 MBC에서 해고되었다. 길었던 MBC 파업의 막바지였다. 같이 해고된 기자·PD들과 무효소송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언제 복직될지 암담했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기다려보자는 결론이었죠. 김재철 사장이 MB 사람이니까 대선 뒤에나 전환점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시간 보낼 것을 찾아야 했다. 해고된 동료 중 누군가는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누군가는 여행을 떠났다. 박 기자는 목공예에 나섰다. 목공예로 30년간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오디오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마니아 중에는 자작 스피커를 만드는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것 말고 다른 걸 해보자 싶었다. ‘평생 들을 스피커를 만들자’가 또 다른 목표였다. 무엇보다 ‘WAF’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오디오 취미가 돈이 많이 드니까 아내의 허락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게 ‘아내 수용 지수’(Wife Acceptance Factor)입니다.” 예쁘게, 아내의 부탁이었다.

사람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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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들이 애용하는 노르웨이산 유닛을 주문해서 받았다. 자작나무로 유닛을 감쌌다. 자작나무는 울림이 좋고 변하지 않아 바이올린 등의 악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로, ‘자작’ 스피커를 만들 때도 많이 사용한다. 유닛을 네모로 감싸면 소리가 각이 진다는 건 ‘음향학’의 진실, 그는 유닛을 동그랗게 감싸는 인클로저를 만들었다. 울림이 좋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름은 ‘쿠르베’로 지었다. 쿠르베는 ‘굽었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박경신 교수가 방송통신심의위원 노릇을 할 때 심의에 의문을 제기하며 올렸다가 음란물 유죄 선고를 받은 의 작가 쿠르베와는 상관없다. “나쁘지 않은 오해죠.”

완성 뒤 몸담고 있던 동호회 회원들을 초청해 청음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2명이 자기 것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좀 비싼데요.” 공업용 본드로 붙인 나무 표면을 일일이 다듬고 사포질을 해 색깔을 내야 하므로 ‘공산’이 불가능하다. “괜찮습니다.” 다니던 공방에 이야기해서 ‘제품 생산’에 나섰다. 공방의 3명이 매달려 한 달에 4~5대 만드는 게 다다. 6월11일 현재 3대를 설치하고 3대 주문을 받았다.

대표 명함을 찍었어도 ‘회사’는 MBC

쿠르베의 그림 중 라는 혁명적 작품이 있다. 박 기자도 그렇게 안녕하다. “해직생활을 버티는 힘이죠.” 무효소송 판결은 올해 말이면 나올까, 혹 YTN처럼 5년씩 걸리진 않을까. 그런데 혹시 잘되면 복직하기 싫어지진 않을까. “한 달에 2~3대 주문이 다일 테니 잘될 일도 없겠지만, 복직만 되면 미련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인도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박 기자는 “회사로 들어가봐야 해요”라고 했다. 내일 스피커 설치 작업이 있다더니 마무리하러 들어가는 건가? “해고 1주년이니 노조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대표 명함을 찍었어도 그의 회사가 어디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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