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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삼성중공업 노조 잔혹사 25년

4·16 항쟁 기념일에 출범한 삼성중공업 일반노동조합… 거제 지역 ‘무노조 삼성’ 성역에 도전
등록 2013-04-27 06:04 수정 2020-05-02 19:27

경남 거제시에는 ‘4·16 항쟁 기념일’이 있다. 1988년 4월16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열흘 동안의 최초 파업을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경남 울산(1997년 광역시 승격), 창원 등에서 번진 노동조합 설립 움직임은 거제도 비켜가지 않았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직원들 일부가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접수하려고 거제군청을 찾았다. 그러나 이들은 한발 앞서 누군가 노조 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동조합법의 복수노조 금지 조항을 이용해 회사 쪽이 노동자들이 만든 노조 설립 신고를 막은 것이다. 얼마 뒤 삼성중공업에서 노조 대신 존재하는 ‘노동자협의회’가 회사 쪽과 임금협상에서 갈등을 빚으면서 직원들은 노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결국 4월16일, 1500명의 직원이 회사 앞에 모여 임금 인상과 노조 설립을 요구하는 파업을 했다. 삼성중공업에서 열린 최초의 자발적인 파업이다.

김경습 삼성중공업 일반노조위원장이 지난 4월17일 경남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 정문 앞에 서 있다. 지난해 10월 해고를 당한 그는 지난 3월 거제시청에 삼성중공업을 포함한 거제 지역 초기업 노동조합 설립 신고를 했다. / 정용일 기자

김경습 삼성중공업 일반노조위원장이 지난 4월17일 경남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 정문 앞에 서 있다. 지난해 10월 해고를 당한 그는 지난 3월 거제시청에 삼성중공업을 포함한 거제 지역 초기업 노동조합 설립 신고를 했다. / 정용일 기자

지금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노동자협의회는 4·16 항쟁 기념일이 되면 회사 앞에서 기념 행사를 연다. 이날은 유급 휴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4월16일에는 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노동자협의회의가 기념 행사를 하기 위해 확성기를 울리던 경남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 정문 앞에서 또 다른 확성기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 일반노동조합’(거제 지역 일반노동조합) 출범식이었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주인공은 김경습(44)씨였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삼성중공업의 18년차 직원이었다. 용접·배관을 하는 기선 담당으로 오래 일했다. 그러나 회사는 지난해 10월 그가 여직원에게 폭언·위협 등을 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해고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지난 4월17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정문 앞에서 만난 그는 노조를 세운 이유에 대해 “삼성 전 계열사가 무노조·반노조를 경영 방침으로 세워 노동자들이 일방적인 구조조정과 징계·해고, 직업병 은폐 등 생존권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며 “이에 맞서고자 초기업 단위 노조를 결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노조 경영’으로 유명한 삼성 안에서 노조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김씨는 회사 쪽과 임금협상 등을 하는 권한이 없는 일반노조를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이 노조는 삼성중공업 직원들만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삼성 일반노동조합’처럼 거제 지역에서 고용돼 일하는 정규직·비정규직의 권리뿐만 아니라 거제 지역 삼성중공업에 근무하는 정규직·사내협력업체 노동자 등 광범위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기업 단위의 노조다. 김씨는 “산업재해 인정 등 권익 보호와 근로조건 개선 활동을 하고, 구조조정으로 나타나는 부당한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을 막고, 징계 해고자들의 복직을 돕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경남 마산에서 잠수함을 만드는 방산업체에서 일하다 1995년 경력사원으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입사했다. 예전 직장에서도 활발하게 노조 활동을 했던 그는 삼성중공업에 들어온 뒤 두 번이나 노사협의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경영과 관련한 일에도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10년 전, 여객선사업부가 해체될 때 부서원들 의사와 관계없이 발령을 내는 것에 항의했다가 정직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회사 앞에서 1인시위를 했죠. 삼성중공업 최초의 1인시위라고 하더군요. 그 뒤로 인사 부서에서 관리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까칠한 대의원’이던 그는 회사가 대의원에게 베푸는 술자리 등 향응도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또다시 대의원에 출마했다. 그는 “회사 쪽에서 대의원 활동을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데, 그 시점에 같은 부서 여직원과 다른 일로 말다툼을 벌이자 징계위원회에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김씨가 거제시청을 찾은 일이었다. “노조 설립을 어떻게 하는지 문의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을 통해 회사가 그 사실을 알고 저한테 해고라는 중징계를 내린 것이죠.”

노조를 세우는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실제로 현재 김씨가 설립 신청을 낸 노조의 원래 이름은 ‘거제지역 일반노동조합’이다. 애초에 ‘삼성중공업 일반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신청했지만 거제시청에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청이 노조의 이름을 제한할 법적 근거는 없다. 그는 “직원들에게 노조 만드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삼성중공업 일반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중공업 해고자 노동조합을 세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현재 삼성중공업 일반노조는 위원장인 김씨를 포함해 모두 2명이 조합원으로 있는 등 미비한 수준이다. 게다가 부지부장을 맡고 있는 이는 삼성중공업과 관련이 없는 거제 지역의 자영업자다. 그렇다면 그는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 질문에 대해 김씨는 “노조의 성역처럼 여겨지는 삼성중공업에 노조라는 말을 세웠다는 것 자체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달라”고 주문했다. 현재 삼성중공업 안에는 1988년 세워진 어용노조와 노사협의회가 있지만, 실제로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노조가 하는 활동을 통해 외부에서 삼성중공업 직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삼성중공업에는 부당 해고자가 200여 명이나 있는데, 이들이 구제받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할 곳은 전혀 없거든요.” 그는 자신이 노조를 설립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당 해고를 당한 것이 잘못됐다는 점을 밝혀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는 장기적으로 삼성중공업 같은 삼성 계열사마다 일반노동조합을 세워 큰 조직을 만들겠다는 밑그림도 그리고 있다. “삼성중공업, 참 일하기 좋은 회사거든요. 그런데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도 노조가 없으니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잘 안 들어줘요. 제가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나 복지 개선은 못하더라도 밖에서 도움을 주는 버팀목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조 활동은 삼성중공업 안에서 자행되는 일들에 대해 조직을 갖춰서 외부 세력과 연대해 힘을 규합해보는 거죠.”

현재 그는 삼성중공업 일반노동조합의 첫 번째 임무로 부당 해고, 명예퇴직 등을 알리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비 오는 날만 빼고 정문과 후문을 오가며 시위를 하고 있다. 과연 25년 전처럼 거제 지역에 노조 설립의 불씨를 붙일 수 있을까. 거제 사람들은 그의 외침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제=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참고 문헌 ‘인간 존중 삼성 재벌, 무노조 전략의 실제: 삼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시도의 역사’(조돈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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