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생명줄을 일단 연장했다. 지난 3월21일 민간 출자사 29곳 중 절반 이상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용산사업 정상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매매·시공 계약을 해지하고 사업계획서를 전면 수정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7년간 얽히고설킨 갈등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을 모양새다.
954호 초점
용산사업을 위기로 이끈 인물로 사업 규모를 무리하게 확장한 오세훈(52) 전 서울시장과 특혜성 조처를 남발한 허준영(61) 전 코레일 사장이 맨 먼저 꼽힌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김기병(75) 롯데관광개발 회장도 빠질 수 없는 ‘주연 배우’다. 자본금(55억원)의 32배에 달하는 1700여억원을 용산사업에 쏟아부었지만 그는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을 주도할 역량이 애초에 부족했다.
롯데관광개발은 코레일지분 (25%)에 이어 용산사업 시행사(드림허브)의 2대 주주(지분 15.1%)이자 개발실무회사인 용산역세권개발의 1대 주주(지분 70%)다. 드림허브 이사회 의장도 김기병 회장이 맡고 있다. 2007년 11월 사업자로 선정된 삼성물산-국민연금공단 컨소시엄에 롯데관광개발은 전략적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2010년 삼성물산이 철수하자 용산역세권개발 지분 45.1%를 인수해 코레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1998년 서울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개발의 실패를 만회하려던 김기병 회장의 야심은 그때 시작됐다.
김 회장은 통산산업부 기획지도국장 등을 지내다 1971년 경영자로 변신한다. 처음 회사를 차리면서 손위 처남인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에게 “사업자금은 필요 없으니 ‘롯데’라는 이름만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회장의 부인은 신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이다. 하지만 1998년 그는 ‘워크아웃 기업인’으로 전락한다. 서울파이낸스센터 공사를 마무리했으나 외환위기를 맞아 임대사업에 실패했다. 자금 압박을 받고 워크아웃을 신청한 그는 서울파이낸스센터를 고스란히 채권자의 손에 넘겨줬다. 한동안 재계에 얼굴을 내놓지 못하다 2004년 코레일과 손잡고 열차관광상품을 개발하는 코레일관광개발을 세웠다. 2005년에는 KTX관광레저를 세워 승객에게 무료로 나눠줄 무가지 발간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시작된 코레일과의 인연이 용산사업까지 이어진다.
코레일은 애초에 고속철도 부채 4조5천억원을 청산하려고 용산사업을 구상했다. 8조원에 이르는 용산 철도정비창 부지(37만2천m²)만 제대로 팔면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2006년 12월 지분 29.9%를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때라 대주주로 참여하면 사업 완공 뒤 더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서울시도 숟가락을 올렸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와 용산사업을 연계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사업계획은 2007년 8월 인근 서부이촌동을 포함한 51만9천m²로 확대됐다. 111층, 620m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와 쇼핑몰, 호텔, 백화점, 아파트 등 66개 건물을 짓겠다는 청사진(연면적 376만여m²)이 나왔고 사업비 규모는 31조원으로 불어났다.
반전은 2008년부터. 세계 금융위기가 밀어닥쳤다. 용산역세권 개발 토지매매 대금이 연체됐고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한 삼성물산은 2010년 9월 손을 털고 떠났다. 그러자 코레일은 주관사 지위를 넘겨받은 롯데관광개발 등에 자금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특혜성 조처를 남발한다. 국제업무단지에 들어설 랜드마크 빌딩을 4조1천억원에 미리 사주기로 하고, 2012~2014년에 내야 하는 땅값 2조2천억원의 지급 시기도 2015년 이후로 연기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코레일이 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코레일 사장은 허준영씨였다.
김기병 회장 일가의 ‘타임머신 탈세 사건’이 불거진 게 그즈음이다. 김 회장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조세포탈 혐의로 2012년 3월 불구속 기소됐다. 김 회장이 증여세 467억원을 내지 않고 장남(43)과 차남(42)에게 735억원어치의 롯데관광개발 주식을 물려줬다는 이유에서였다. 감사원이 국세청을 감사하면서 김 회장이 가짜 소송과 허위 주주명부로 세금을 탈루했다고 지적했고, 검찰이 이를 기소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두 아들이 8살·7살이던 1978년에 넘겨준 주식이라 과세 시효(15년)가 지났다고 반박했다. 결국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최동렬)는 2013년 1월 “유죄 증거가 부족하다”며 김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탈세 사건은 코레일과의 관계를 깨는 송곳으로 돌아왔다. 2012년 2월 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낸 정창영씨가 코레일 사장으로 임명됐다. 정 사장은 감사 대상이던 김기병 회장을 미덥지 못한 사업 파트너로 여겼다고 한다. 땅값 납부 연기 등 과거 특혜성 조처를 비롯해, 코레일이 위험을 떠안는 출자 구조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또 이대로는 사업성이 낮으니 용산역 철도정비창 부지부터 단계적으로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분양가가 비싸고 한꺼번에 많은 물량이 공급돼 위험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롯데관광개발이 이끄는 민간 출자사는 흑자가 날 수 있다며 당초 계획대로 일괄 개발을 주장했다. 옥신각신하다 지난 3월12일, 만기를 맞은 기업어음 2천억원의 선이자 52억원을 내지 못해 용산사업은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놓인다. 파산할 경우 1조원가량이 사라질 상황이다. 여기에는 국민연금공단의 투자 금액 1250억원도 들어가 있다.
용산사업에 1700여억원을 투자한 롯데관광개발은 2011년 104억원, 지난해 236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앞서 포천관광레저 개발과 개성관광 사업 진출에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특히 포천관광레저 사업은 사업이 취소된 지 2년 만인 2012년 6월에 관련 내용을 공시해 논란을 빚었다. 3만원에 머물던 주가가 이 사업 계획으로 8만원대까지 치솟았다가 뒤늦게 1만원대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기병 회장은 자신의 일가가 롯데관광개발 주식의 50% 이상을 보유했다는 점을 내세워 개발사업을 밀어붙였다.
용산사업이 부도 위기에 빠진 지 6일 만인 지난 3월18일 롯데관광개발은 기업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한다. 롯데관광개발 관계자는 “용산사업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대출금 만기 연장이 문제될 수 있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다음날 서울중앙지법 파산1부(재판장 이종석)는 롯데관광개발에 대해 재산보전 및 포괄적 처분금지 명령을 내렸다. 법원의 허가 없이는 일절 재산 처분이나 채무 변제를 할 수 없고 채권 가압류와 가처분, 강제집행 등도 전면 금지됐다. 롯데관광개발의 처지에선 용산사업의 2대 주주 지위는 유지하면서도 용산사업 부도에 따른 채무 변제는 한동안 피해갈 ‘묘수’를 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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