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시간 중 감금한 것은 사회적 정당성이 인정된다.”
1988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감금죄에 대해 이렇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총리 후보자로 지목됐던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었다. 민주통합당 이언주 대변인은 “‘부산판 도가니’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 재판장이 ‘사회적 약자의 상징’인 김 후보자라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총리 후보자에서 사퇴한 다음날인 1월3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38)씨는 “김 위원장이 국회 청문회에 나오면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라며 그의 사퇴를 아쉬워했다.
1987년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수용인원 3146명)에서 직원의 구타로 수용자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찰 조사 결과 복지원이 부랑아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해 암매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일부 주검은 300만∼500만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게 사건의 배경이었다.
한종선씨는 1984년, 9살 때 12살인 누나와 함께 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로부터 3년 뒤 복지원이 폐쇄됐지만 그는 짐승의 눈빛과 끔찍한 기억을 지닌 아이가 됐다. 한씨의 누나는 성폭행을 당해 정신분열증을 얻었고 구두닦이였던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다가 복지원에 끌려온 뒤 지금까지 정신병원을 떠돌고 있다.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지난해 11월 펴낸 저서 에서 한씨는 지옥과도 같은 삶을 증언했다. “우리들의 의복은 하얀색 팬티와 러닝셔츠, 감색 추리닝 한 벌,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 전부였다. 몸이 꽝꽝 얼어붙는 추위가 겨울 내내 이어졌다. 거의 모든 원생들의 손과 발이 퉁퉁 부어 동상에 걸렸다. 우리는 항상 새벽 4시에 기상했다. 식단은 언제나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과 소금 뿌린 깍두기. 우리는 매일같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돌았다.”
형제복지원은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군대였다. 장기 복무 헌병 부사관 출신인 박인근 원장이 중대장-소대장-총무-조장-소대원을 지휘했다. 언제든지 그들의 자리를 교체할 수 있는 박 원장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군기를 잡기 위해” 조장은 매일 때렸다. “때리는 조장들은 아무 꼬투리나 잡아서 때린다. 맞는 소대원들은 왜 맞는지도 모른 채 맞는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복지원을 맴돌았다. 한씨는 죽어나가는 원생들을 서너 번 정도 목격했다.
복지원은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왔다. 국고보조금이 사람 수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갇힌 이들 중에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 바람을 쐬러 나온 여성,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농촌에서 흘러든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있었다. 자활 능력이 없는 사람은 10%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멀쩡한 상태로 잡혀와 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됐다. 한씨의 누나와 아버지처럼 말이다. 복지원은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 18억원, 1986년 20억원 남짓을 중앙정부와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박인근 한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박인근 원장도 승승장구했다. 1981년 1월 장애자의 날 석류장을, 1984년 11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받았고 전국부랑인복지시설연합회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밝혀진다. 당시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가 그해 1월16일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다. “교도소를 뺨치는 어머어마한 철문과 성곽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복지원의 원장실에서는 20억원이 넘는 각종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가 쏟아졌다. 박 원장은 2년간의 국고보조금 39억원 가운데 11억원을 횡령했고 수용자들을 감금했음이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고 고아를 제외한 2천여 명이 한꺼번에 풀려났다. 인권유린의 피해자인데도 아무런 보상도, 재활 교육도 없었다.
김 변호사는 1993년 펴낸 저서 에서 당시 외압에 시달렸음을 고백했다. 수사 검사는 원래 징역 20년을 구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찰총장 등 ‘윗분들’은 징역 15년 혹은 징역 10년을 요구했다. 횡령 액수도 6억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7년 6월 검찰은 박 원장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6억원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징역 10년과 벌금 6억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박 원장의 형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법원이 감금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두 차례나 원심을 파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장은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더니 1988년 7월 2차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88년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한 사건이 일곱 번의 재판을 거치는 사이 원장에 대한 형량은 당초의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원장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감금한 행위는 대법원의 고집에 의해서 무죄로 확정됐다.”(에서) “대법원의 고집”에는 김용준 위원장도 당연히 포함된다.
한종선씨는 “감금은 폭행·살인을 증명하는 첫 단추였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그걸 무죄로 만드니까 폭행·살인죄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인권유린이 분명히 있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김용준 위원장이 청문회에 서면 ‘당시 무죄를 선고한 게 올바른 판결이었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 대답마저도 이제 못 듣게 됐다.” 그는 또 당시 형제복지원의 감금이 불법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왜 시설을 폐쇄하고 수용자를 풀어줬느냐고 반문했다.
지금도 복지재단 운영하는 박인근 일가벌금도 선고받지 않고 2년6개월 만에 풀려난 박인근 원장은 재기했다. 법인의 이름만 수차례 바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1929년생인 박 원장은 2011년 4월7일까지 형제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3남 박천광(37)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인근 원장은 2008년 8월 ‘대안학교’인 신영중·고교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2010년 12월 첫째딸에게 넘겼다.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는 한종선씨가 말한다. “도가니 사건이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부터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법치국가라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반만이라도 가해자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