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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텅 빈 대학 기숙사, 배낭여행족을 맞이하다

등록 2012-07-31 18:33 수정 2020-05-02 04:26

여름방학을 맞아 재학생들이 빠져나간 대학 기숙사가 배낭여행족을 위한 숙소로 변신했다.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세명대가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인 세명학사 4인1실 6개를 7월22일부터 8월4일까지 2주 동안 개방한 것이다. 내일로(만 25살 이하 내·외국인이 새마을호·무궁화호 등의 자유석이나 입석을 7일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상품) 티켓 소지자는 1박당 7천원, 그 외 여행객은 1박당 1만원에 숙박이 가능하다. 5월28일 발간된 912호 특집 ‘공유경제를 막는 법들’에서 소개한 대학생 김태연(23)씨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된 셈이다. 그는 당시 방학 동안 대학 기숙사를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돔서핑’(Dorm Surfing) 시범 서비스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돔서핑은 재화를 소유하지 않고 공유·교환·임대·활용하는 ‘협력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ption)를 기반으로 하는 공유경제 모델이다.

젊은 여행객들이 대학 기숙사를 숙소로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 ‘돔서핑’ 대학생 서포터스들이 충북 제천시 세명대 기숙사에서 잠시 짬을 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젊은 여행객들이 대학 기숙사를 숙소로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 ‘돔서핑’ 대학생 서포터스들이 충북 제천시 세명대 기숙사에서 잠시 짬을 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술 없이도 새벽 3시까지 도란도란

7월24일, 여름밤이 깊어지자 ‘돔서퍼’ 20여 명이 세명학사 7층 한 방에 모여앉았다. 이들이 공유하는 건 저렴한 비용의 잠자리만은 아니다. 김태연씨는 여행객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숙박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를 위해 대학생 서포터스를 모집했다. 이렇게 모인 18명은 5개 팀으로 나누어 각자 기획한 콘셉트로 3일간 숙소를 운영한다. 이날은 파자마 차림으로 격 없는 ‘어울림’을 만들겠다는 파자마팀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서포터스 이종민(26)씨가 기타를 들었다. 돔서퍼들이 돌아가며 노랫말을 지어 불렀다. 기숙사인 만큼 흡연과 음주는 금지된다. 술 없이도 새벽 3시까지 수다는 이어졌다. 또래들이 모이다 보니 진로·취업 등 고민거리가 비슷했다. 이날 자리에 함께한 이홍연(24)씨는 자신의 특별한 여행담을 들려주었다. 그는 카우치서핑(www.couchsurfing.com)을 이용해 각각 한 달씩 세 차례 미국 동부 지역을 여행했다. 카우치서핑은 소파를 의미하는 ‘카우치’(couch)와 인터넷 검색을 의미하는 ‘서핑’(surfing)을 합친 말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무료로 여행객을 재워주고 서로의 문화도 교류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비영리 커뮤니티다. 이씨는 “방을 제공해준 이들은 카우치서핑에 대한 애정이 뜨거웠고, 이런 숙박문화를 함께 확산시키자고 했다”며 “이런 철학에서 유래한 돔서핑 역시 좋은 취지라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불이 따로 없는 돔서퍼들은 전국 각지에서 기증받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또래 아이를 둔 이웃 엄마들과 함께 모여 책도 읽어주고 나들이도 다니는 공동육아 모임 ‘품앗이파워’ 회원들이 보내준 이불이다.

1인 고군분투… 학교 섭외도 쉽지 않아

돔서핑 서비스 현실화는 태연씨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선 기숙사를 내줄 대학 섭외가 쉽지 않았다. 스무 군데가 넘는 학교와 접촉한 끝에 세명대와 연이 닿았다. 특별한 예약 시스템 없이 구글 문서도구를 활용했다. 누군가 예약을 하면 가능 여부를 일정한 시간 내에 확인해 통보해줘야 한다. 덕분에 태연씨는 한 달 동안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다. 대학 기숙사의 숙박시설 활용 적법성 여부는 현행법 잣대로 보면 여전히 모호하다. 여수엑스포 조직위원회가 행사 기간에 관람객 숙박 편의를 위해 전남대·순천대 기숙사를 숙박시설로 활용하기로 해 이를 참고했다. 숙박 비용을 세명대에 장학금으로 전달하고 싶지만 아직 그럴 정도의 수익이 날 것 같진 않다. “서비스 준비하면서는 너무 힘들었는데, 운영을 시작하니깐 잘했다 싶었어요. 젊은이들의 새로운 숙박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어 이런 것을 실험하게 됐는데, 개인 한 명이 운영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큰 수익이 나는 구조도 아니고 방학 때만 운영이 가능하니까요. 여행 관련 기관·지자체 등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되면 좋을 것 같아요.” 돔서핑에 대한 배낭족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서비스 시작 이후 모든 예약은 마감됐다. 태연씨는 오는 겨울, 서비스를 한 번 더 해볼 생각이다.

제천(충북)=글·사진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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