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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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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부’의 침몰한 국격

뉴질랜드 정부 보고서, 원양어선 선원 인권침해, 성적 학대 ‘유일한’ 국가로 한국 지목…
뉴질랜드는 32명 선원 대면 조사한 반면 한국 인권위는 오양75호 진정을 면접 조사도 않고 기각
등록 2012-05-16 19:30 수정 2020-05-03 04:26

뉴질랜드 노동부(Department of Labour)가 한국 원양어선 ‘신지호’가 노동조건 등에 대한 뉴질랜드 정부의 조사에 답변을 거부한 이유로, 지난 3월5일 외국인 선원을 고용할 수 없도록 처분한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뉴질랜드 농림부(Department of Agriculture and Forestry)는 선박 안전 기준을 어겼다며 지난 2월 신지호의 조업 허가를 아예 박탈해버렸다'.

“(외국인) 선원에 대한 저임금과 학대에 대한 수많은 의혹과 보고가 제기돼왔다. 본 조사단에 제기된 모든 항의는 한 국가에 대한 것이다.”(뉴질랜드 정부 보고서 7장)

‘한 국가’의 정부가 잠자는 사이, 해외에서 ‘한 국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이 단독 입수한, 뉴질랜드 정부가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외국인 선원 학대, 불합리한 노동계약 등과 관련해 뉴질랜드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조업하는 사조오양의 원양어선과 또 다른 원양어선 신지호를 강하게 비판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 어선이 뉴질랜드 해역에서 조업한 이후 최초로, 선박 안전 기준 위반 등의 이유로 지난 2월 한국 어선 한 척의 조업 허가가 박탈된 사실도 드러났다. 논란의 강도는 ‘한국 국격의 침몰’로 표현해도 될 정도다.

“선원 처우 문제 등은 주로 한국 어선에 국한”

뉴질랜드 정부는 ‘외국 어선의 운용에 대한 관련 부처 조사 보고서’(Report of the ministerial inquiry into the use and operation of foreign charter vessels)에서 어장 관리(Management of Fishery) 기준, 선박 안전(Vessel Safety), 고용·노동 조건, 학대 등 갖가지 이슈와 관련해 한국 원양업체의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한국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사건과 관련해 외국인 선원의 노동조건과 학대 문제가 주목할 만하다. 뉴질랜드 정부는 2장 ‘국제적 평판’ 항목에서 “2011년 내내 선박 안전, (외국인 선원의) 노동조건, 선장과 간부에 의한 신체적·성적 학대(abuse), 저임금(underpayment)과 근로시간표 조작(manipulation of time sheet)이 있다는 의혹과 항의가 제기됐다. …노동착취와 기준 미달의 노동조건에 대한 이런 의혹이 진보적이고 공정한 국가라는 뉴질랜드의 평판에 해악을 끼쳐왔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고서는 “평판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보고된 사건 대부분은 한국 어선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특정 한국 원양업체와 어선의 이름이 이런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학대 의혹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향해 있다”고 밝혔다.

이런 주장은 뉴질랜드인 어부들에게서도 제기됐다. 복수의 뉴질랜드인 선주와 어부들은 정부 조사팀에 “몇몇 경우, 한국인 간부의 행위가 착취 수준에 이르렀다는 혐의가 있다”고 답변했다. 이들은 “선박 안전, 선원 처우 문제 등은 주로 한국 어선에 국한되며 우크라이나·일본·도미니카 원양어선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 많다”고 진술했다. 뉴질랜드 노동부(Department of Labour)가 한국 원양어선 ‘신지호’가 노동조건 등에 대한 뉴질랜드 정부의 조사에 답변을 거부한 이유로, 지난 3월5일 외국인 선원을 고용할 수 없도록 처분한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뉴질랜드 농림부(Department of Agriculture and Forestry)는 선박 안전 기준을 어겼다며 지난 2월 신지호의 조업 허가를 아예 박탈해버렸다.

뉴질랜드 정부의 조사는 한국 원양어선 때문에 촉발됐다. 2010년 오양70호가 전복됐다. 인도네시아 선원 등 6명이 숨졌다. 안전장비 부족 등의 문제가 지적됐다. 2011년에는 오양75호의 인도네시아 선원 32명 전원이 성희롱과 폭행 등을 이유로 배에서 도망쳤다. 뉴질랜드 사회에 파문이 일었다. 현지 언론이 한국 원양어선의 학대 의혹을 크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 경영대학에서 먼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학대, 저임금 등이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뉴질랜드 정부가 나섰다. 뉴질랜드 농림부와 노동부가 합동으로 조사단을 꾸렸다. 뉴질랜드 정부 조사는 2011년 8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됐다. 72명의 뉴질랜드 및 외국 선주, 인력알선업체(manning agent), 선박운영회사, 선원 등 업계 관련자들에게서 서면 답변서를 받았다. 32명은 대면 조사했다. 뉴질랜드 정부 조사단과 오클랜드 경영대학 연구소는 2011~2012년 직접 인도네시아를 찾아 오양75호에 탔던 인도네시아 선원 대부분을 인터뷰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서문에서 “이 보고서는 외국 원양어선 조사에 대한 집합적 시각(collective view)을 대표한다”고 못박았다. 다만, 보고서 내용이 곧바로 정부 정책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오클랜드 대학, 성추행 신빙성 인정

한국 언론에 일부 소개된( 한국판 2012년 1월호 ‘남획과 유린, 한국 참치배의 경쟁력’ 참조) 오클랜드 경영대학 아시아 연구소의 지난해 11월 보고서의 내용과 결론도 충격적이다. 한국인 간부가 외국인 선원을 껴안고, 키스를 시도하고, 성기를 문지르는 행위 등을 했다는 인도네시아 선원의 주장이 신빙성 있다고 인정했다. 이 대학 연구팀도 오양70호, 오양75호에 탔던 인도네시아 선원 등 모두 144명을 인터뷰했다. 뉴질랜드 인권위와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인권위도 한국 인권위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청와대가 연임을 결정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겨레 자료

청와대가 연임을 결정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겨레 자료

그러나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위원회가, 국제민주연대와 서울공익법센터 등이 스기토와 트리스만토 등 오양75호의 인도네시아 선원 6명을 대신해 ‘성희롱 등을 겪었다’며 지난해 제출한 진정에 대해 지난 4월18일 기각결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인권위는 이런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다. 상임위 안팎을 취재한 결과, 인권위는 오양75호에서 보조갑판장으로 일하던 피진정인 강아무개씨가 인도네시아 선원 6명의 성기를 만지거나 이들의 몸에 자신의 성기를 비볐다는 ‘개연성’을 인정했다. 인권위는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가해자로 강씨를 지목하고 강씨가 자신의 성기를 내밀거나 피해자들의 몸에 비비고 피해자들을 껴안고 샤워 중인 인도네시아 선원을 쫓아갔다고 하는 등 공통점이 발견돼 성희롱 행위의 발생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인권위는 “피해자와 목격자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등 석연찮은 이유로 기각결정했다. 다만 인권위는 원양어선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근거로 “원양어선 내 선원들의 성희롱 예방 및 구제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일종의 ‘타협안’인 셈이다. 결정 과정에서 위원 사이에 견해 차이가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권위 쪽은 “(한 차례 완성됐던) 결정문을 다시 고치고 있다. 언제 최종 결정문이 나올지 아직 확실치않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갑판장 최아무개씨가 폭행과 폭언을 했다는 혐의도 사실로 인정했다. 사조오양이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임금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했다는 의혹도 사실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인권위는 폭언 문제와 임금 문제는 인권위의 조사 대상을 벗어난 주제라며 ‘각하’결정했다.

한국인 선원과 사조오양은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강아무개씨는 구체적 설명 없이 “성적 언동을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인권위에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아무개씨는 “소리를 지르거나 발로 가볍게 툭 치거나 머리를 살짝 치거나 귀를 당기거나 한 적은 있으나, 심하게 폭행을 한 일은 없다”고 인권위에 답했다. 사조오양은 구체적 설명 없이 “임금은 모두 정확하게 정산해 지급했다”고 답했다. 사조오양은 취재에는 답변을 거부했다.

불성실함은 또 다른 문제다. 인권위는 중요한 참고인 4명의 “진술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진정을 기각했다. 이 인도네시아 인권단체 ‘앗키 인도네시아’(ATKI Indonesia)에 문의하자 이들의 근황이 간단히 파악됐다. 1명은 자카르타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3명은 현재 러시아 어선에서 일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4명은 이미 뉴질랜드 정부와 인터뷰했다. 인권위는 진정인 6명을 단순 서면조사하는 것에 그쳤다. 앗키 인도네시아의 활동가 이웽은 “한국 인권위가 이 사건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인권위, 피해자 면접 시도도 안 해

오클랜드 경영대학 부교수로 조사를 주도한 크리스티나 스트링거는 전자우편을 통해 “한국 인권위가 몇 명의 인도네시아 선원을 인터뷰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수의 인도네시아 어부들이 반복적으로 성희롱(sexually harassed)과 성폭행(sexually raped)을 당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에 답했다. 스트링거 부교수는 “한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오클랜드 보고서를 제공했으나 이후 아무 답변도 들은 바 없다”고 덧붙였다. 뉴질랜드 정부는 보고서 말미에 “관련국과 선박 정보가 일반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7장)며 한국 정부의 비협조를 에둘러 비판했다.

국제적 관행에 따라, 어장 관리 기준 등이 아닌 한, 외국 원양어선의 노동·인권 문제의 경우 뉴질랜드 정부에 조사 권한이 없다. 대한민국이 법적 책임자다. 농림수산식품부, 외교통상부, 국토해양부, 인권위 등은 2011년 8월 이후 지난 3월까지 모두 세 차례 합동 회의를 열었다. 이 부처들은 사조오양을 포함해 조사 대상인 한국원양업체를 회의에 참석시켰으면서도 인도네시아 선원을 접촉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세 차례 회의 뒤에도 아직까지 제도 개선책을 내놓지 않았다. 아직, ‘한 국가’는 잠자고 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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