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추위가 극성이다. 날마다 최대 전력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보다 더 싸늘한 통보를 받은 이들이 있다. 휴대전화로, 전자우편으로, 공문으로 해고와 퇴학 처분을 받은 이들이다. 희망으로 다가와야 할 새해가 서럽기만 하다. _편집자
인천공항세관에서 일하는 한치동(63)씨는 올해는 아내와 여행을 가볼 생각이었다. 인천공항세관에서 2008년 6월부터 일하며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올해 새롭게 계약을 맺는 회사에서 연·월차 휴가를 받아 여행을 다녀올 희망에 부풀었다. 전국일주와 해외여행을 두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 이런 꿈은 지난해 12월31일 밤 11시에 산산조각이 났다.
“케이티지엘에스입니다. 1년여 동안 수고하셨고, 2011년 12월31일 24:00를 기해 인천세관 전자태그 부착 용역이 만료됩니다. 2011년 12월31일 23:00까지 전 직원 현장에서 철수하여 퇴실하시어 보호구역 출입증을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24:00 이후 출입할 경우 출입증이 정지되어 보안요원의 제재를 당하오니 그 이후에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3년 넘게 휴가도 없이 일했지만
한씨가 일하던 회사가 새해 인사 대신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날도 작업 중이었다. 관세청 인천공항세관은 수하물에 전자태그를 붙이는 업체를 입찰로 선정해왔다. 업체는 매년 바뀌지만 한씨와 동료들은 계속 일했다. 하지만 케이티지엘에스에 이어 입찰을 따낸 포스트원은 고용 승계를 거부했다.
일은 아침 7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7시까지 24시간 동안 한다. 다시 하루를 쉰 뒤 출근한다. 24시간 맞교대 근무 형태다. 한씨는 도착한 비행기가 토해내는 수하물 가운데 엑스레이 조사에서 의심이 가는 것에 네 가지 색의 전자태그를 붙였다. 과일·고가품·위험물·약 등 세관이 재조사할 필요가 있는 것에 초록·노랑·빨강·주황색 전자태그를 붙이는 것이 그의 업무다. 새벽 1~4시, 비행기 도착이 뜸할 때 모니터실에서 한두 시간 선잠을 잔다. 쉬는 날은 못다 한 잠을 자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일하며 휴가는커녕 가족 경조사에도 제대로 참석할 수 없었다. 3년 넘게 일하는 동안 쉰 적은 형 2명과 누나가 세상을 등진 때뿐이었다. 그때도 장례식에 가기 바빴지만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7일간 상을 치르는 동안 빈자리를 메울 동료를 직접 구해야 했다. 동료에게 하루 일당 8만원과 식권 2장을 계산해주고 미안한 부탁을 해야만 했다. 지방에서 조카들이 결혼할 때는 아예 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일해 받은 돈이 월 115만원.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받은 월급과 국민연금 50만원을 더한 165만원으로 아내와 함께 지냈다. 아내는 갑상선 질병을, 한씨는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 매월 들어가는 20여만원의 치료비도 그 돈으로 해결했다. 그래도 떳떳했다. 한씨는 “다 큰 아들과 딸이 있지만 자식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며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장갑을 두 개씩 끼고 일하던 수하물 검색대에서 한 개만 끼고 인천공항 출입구에 서 있다. 문자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새해 첫날부터다. 손에는 전자태그 대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피켓이 들려 있다. 동료 30명도 함께한다. 모두 한씨처럼 2011년 12월31일 밤 11시 같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결혼식이 있어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친척집에 있던 박유선(62)씨도, 한씨와 검색대에서 일한 육근태(62)씨도 있다. 모두 지난해 7월 설립된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소속이다. 노동조합의 신철 조직국장은 “케이티지엘에스와 포스트원은 전화번호가 같고 한 임원이 다른 회사의 감사로 일하는 등 사실상 같은 회사”라며 “회사 쪽은 ‘개별 면접에 응하지 않아서 고용계약을 끝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난해 7월 노조를 세우자 연·월차 휴가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할까봐 미리 해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국장은 “현재 숙련 노동자들이 없어 공항의 수하물 처리에 차질이 있다”며 “빨리 이 사태를 풀려면 원청업체인 인천공항세관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비정규직 돕는 기관이 비정규직 잘라
새해 첫날을 시위로 시작한 사람은 인천공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사발전재단에서도, 서울 시내 공공도서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모두 지난해 12월 세밑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노사발전재단의 김선구(가명)씨는 지난해 12월29일 야근하던 중 밤 9시에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전자우편에는 한 줄의 글만 있었다. “근로계약의 종료를 통지합니다.” 몇 개 되지 않은 글자에 김씨의 속은 문드러져갔다.
다른 공공기관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김씨는 해당 기관이 없어져 2010년 재단에 입사하며 비정규직이 됐다. 맡은 일은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위한 것이었다.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돕는 일을 해온 셈이다. 그리고 지난 연말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을 실감했다. 그는 “이번 일로 한진중공업 사태와 쌍용차 사태 당시 노동자들이 겪었을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같은 날 노사발전재단의 비정규직 30명도 같은 내용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이영식(가명)씨는 다음날 출근한 뒤에야 전자우편을 확인하고서 해고 사실을 알았다. 종무식이 열린 지난해 12월30일은 이들의 눈물과 울음으로 차갑게 젖었다. 떠나는 이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울분에, 남은 비정규직은 떠난 직원의 자리에서 일하라는 지시에 고개를 떨구었다.
노사발전재단은 고용노동부로부터 사업을 위탁받아 업무를 한다.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다. 누리집에는 지난해 12월5일 인천시와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을 위한 업무협약식’을 맺었다는 소식도 담겨 있다. 협약식에 대해 “재단이 추진하는 ‘고용차별 개선사업’과 인천시의 ‘비정규직 근로자 고용안정 정책’이 추구하는 목표가 맞아떨어졌다”며 “지난해부터 전국 6개 지역에 ‘차별 없는 일터 지원단’을 설치하고 비정규직의 차별 개선과 처우 개선 지원 등 직장 내 차별 예방을 위한 교육·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고 밝혔다. 또 “민간부문의 차별 개선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공공부문부터 선도적으로 비정규직의 차별 개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보고, 올해 들어 대전시설관리공단, 대구도시철도공사 등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 등과 업무교류 협약을 체결하여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비정규직을 해고했다. 권혜영 노사발전재단 노조위원장은 “노사관계를 선도하는 모델이 되고,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재단이 오히려 해고를 남발하고 있다”며 “인사평가, 임금책정 등에 대해 노조와 대화도 없이 일방통행식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느닷없는 사업 종료에 따른 해고
해고자들은 정당한 평가도 없이 해고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권혜영 노조위원장은 “재단은 ‘개인의 근무평가 결과와 지각 등 근무태도 등을 고려해서 해고 대상자를 선별했다고 주장했지만, 지난해 12월 초에야 평가 기준을 만들었다”며 “결국 사나흘 만에 ‘인기투표’와 다름없는 다면평가를 통해 해고자가 선별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단 쪽은 “지난해 10월 기준을 마련해 그 결과가 계약 연장의 기준이 된다고 알렸다”고 해명했다.
김선구씨는 아직 가족에게 해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1월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에 가족 모두 기대를 갖고 있어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오는 4월이면 2년을 채우게 돼 무기계약직 전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가족도 알고 있다. 김선구씨는 일자리를 잃게 됐지만, 지금도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출근한다”고 인사한다. 그러곤 사무실이 아닌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앞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서울 강서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해온 박영희(가명)씨도 같은 처지다. 그는 지난해 12월까지 강서도서관에서 일하다 12월31일로 해고됐다. 조씨는 그동안 ‘순회사서’로 공공도서관 소속으로 각 학교를 방문해 도서관 관리를 했다. 동료 2~3명씩 짝을 이뤄 학교 도서관을 방문해 책의 바코드와 청구기호 등을 기록하고, 도서 정리와 현황 파악 등을 해왔다. 그렇게 지난해 12월까지 1년7개월을 일해 무기계약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정규직이 학교를 방문할 때 받는 출장비 2만원을 못 받는 등의 설움도 감수했다. 희망 가득한 새해는 오지 않았다.
해고는 교육청이 순회사서 사업을 지난해로 종료하기로 결정한 탓에 이뤄졌다. 순회사서는 서울시교육청 산하 강서·남산·정독·동대문·양천도서관에 45명이 있다. 애초 2003년부터 5년을 목표로 시작한 사업이 성과가 좋아 2008년부터 다시 5년이 늘어났다. 하지만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12월21일 사업 종료를 결정했고, 공공도서관들은 이들에게 지난해 12월31일로 계약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했다.
박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3명이 먼저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다시 학교나 도서관에서 새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굴레를 되풀이해서 쓸 수밖에 없다. 그는 “현재 세금을 제하고 월 139만원 정도를 받는데, 일자리를 찾아도 10개월 단위로 계약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며 “경력 인정도 못 받고 임금은 월 90만원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또 “남편이 사업을 하다 실패해 가족을 부양하는 처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고 하소연했다. 나머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이들도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 시교육청에서 올해 6개월의 예산만을 책정했다. 박씨를 포함한 순회사서들은 도서관 대신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시교육청 정문을 찾고 있다.
“나와 같은 일 안 당하도록 싸울 것”
이 밖에 서울 구로구의 방문 간호사, 전국 학교의 기간제 교사 등 수많은 비정규직이 해고 통보를 받았거나 받을까 걱정하고 있다.
새해 첫날을 먹먹한 가슴으로 맞이한 이는 비정규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국대 최장훈(26)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들도 학교에서 잘렸다. 동국대는 지난해 12월30일 최장훈씨를 비롯해 3명을 퇴학 처분하는 등 10명을 징계하고, 20명에게 사회봉사 명령을 통보했다. 지난해 12월5일부터 8일간 총장실을 점거해 기물을 파손하고, 같은 달 17일에 열린 입시설명회에서 소란을 부렸다는 게 이유다.
동국대는 지난해 5개 단과대 11개 학과를 통폐합하는 학문구조 개편안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게 총학생회 주장이다. 최장훈씨는 총장실 점거 농성은 답이 없는 학교 쪽에 대응하는 차원이었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4월 학과를 통폐합하려는 학문구조개편위원회가 생긴 뒤 계속 논의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며 “자료 공개나 대화 요청에 대해 학교는 ‘아직 진행 중이고 결정된 것이 없다’고만 답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9월 말 개편안이 나온 뒤에도 자료도 제공하지 않은 채 설명회에 참석하라고 요구해, 자료 제공과 준비 시간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며 “그동안 대화를 위해 피켓시위, 연좌농성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들어주지 않아 총장실 점거를 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최장훈씨는 지난해 11월 학생 4천여 명의 지지를 받아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지난 1월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그는 퇴학 처분에서 오히려 ‘희망’도 본다고 했다. 그는 “퇴학 처분이 알려지자 많은 관심을 받았다”며 “지난 1월5일 재심을 청구했고 그 결과에 따라 법적 소송과 함께 조계사와 교육과학기술부 등에서 집회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징계를 받은 친구들에게도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왜 점거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하자”며 “정당한 요구를 한 것이기 때문에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힘겨운 새해를 맞이한 해고노동자들은 새로운 다짐으로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 이제는 그리운 일터로 돌아가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인천공항세관의 한치성씨는 “아내와 아이들은 추운 데서 고생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한다”며 “설사 일터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일을 할 경우 같은 대접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하고 이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노사발전재단의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발 방지를 위해 책임을 묻고 여전히 남아 있는 비정규직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말뿐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정부는 지난해 11월28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을 보면 상시·지속적 업무에 종사하는 기간제 근로자를 직무 분석·평가 기준에 따라 일정 기준의 해당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이 솔선수범해 민간부문을 선도한다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정부 대책에 기대를 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국민 여러분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신년사가 한겨울 맵찬 바람에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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