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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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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 531일 만의 잔치

재개발 용역 철거에 저항해 싸워온 두리반 다시 문 연 날… 함께 싸워준 사람들 위해 “상업주의에 맞서는 인디문화의 아지트 세울 것”
등록 2011-12-15 14:22 수정 2020-05-03 04:26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다. 9번 출구를 찾았고, 찬바람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12월 첫날, 하늘은 청명했다. 맑은 하늘을 따라 들어선 골목길에서 기타와 아코디언 소리가 들린다. 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선율이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이곳은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0-5번지, 칼국수·보쌈 전문집 ‘두리반’이다.

명동, 북아현동으로 이어지는 연대
이날은 잔칫날이었다. 531일 만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두리반을 오가고 있었다. 방문자에게 나눠줄 유인물을 준비하는 사람들, 안종녀(52)·유채림(50) 부부에게 전달할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들, 두리반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 두리반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스스로를 ‘두리반 주인 남편’이라 부르는 소설가 유채림씨는 빛 잃은 두리반을 300여 일 동안 밝혀준 건전지 촛불을 준비 중이었다. 두리반의 어둠을 밝혀주던 촛불은 이제 두리반의 미래를 비춘다. “요즘에는 명동이랑 북아현동에 가서 연대하고 있어요.” 두리반의 미래는 서울 명동으로, 북아현동으로 향하고 있다. 카페 ‘마리’가 있던 명동 3구역은 협상이 이뤄졌지만 2·4구역은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고, 북아현동 철거민들은 용역의 폭력에 자신의 삶터를 잃은 채 길바닥에 천막을 쳤다. 명동과 북아현동은 또 다른 두리반이다.
사실 유씨는 두리반 농성이 531일이나 지속될 거라 생각지 못했다. “용산에서 본 폭력이 두렵기도 했고, 적어도 중산층 끝자락은 잡고 있다고 생각한 자존심 때문에 창피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농성을 시작하려는 부인을 말리려 했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 이제부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라’고 하는데 말려도 소용없었죠.” 그렇게 부부는 용역이 둘러놓은 철판을 뜯어내고 그들의 삶터로 들어섰다. 2009년 12월26일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새벽 2시였다. 부부의 손에는 침낭과 절단기만 들려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부를 처음 찾아온 사람들은 유씨의 동료 작가들이었다. 그 뒤로 홍대 인디밴드가 찾아왔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찾아왔다. 시와 음악, 영화가 두리반에 자리하자, 사람들이 찾아왔다. 하루에 10명, 20명, 많게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두리반을 찾았다. 찾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용역깡패들은 움츠러들었다. 부부를 버티게 해준 버팀목이자, 승리의 원동력이 된 사람들을 두리반은 잊을 수 없다.
“투쟁을 함께 해준 이들, 낭독회를 이끌어준 작가들, 음악을 연주해준 밴드들, 영화를 보여준 감독들, 이런 분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계획 중이에요. 상업주의가 판치는 이곳에서 상업주의에 맞서는 인디문화의 아지트를 세우려 합니다.” 유씨는 지금 자금을 모으고 있다. 내년에 두리반 이야기를 엮은 책을 출판할 계획이다. 이제 유씨는 소설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글을 쓴다. 두리반의 희망을 담은 글을 쓴다. 두리반 친구들과 밴드도 한다. 음악을 필요로 하는 철거 현장에서 드럼도 친다. 그는 소설가이자 드러머가 되었다.

지난 12월1일. 40여 명의 두리반 친구들이 개업기념 잔치를 했다. 이상원 인턴기자

지난 12월1일. 40여 명의 두리반 친구들이 개업기념 잔치를 했다. 이상원 인턴기자

두리반의 미래를 비추는 촛불

이날 행사는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카메라 앵글 속 모두는 건전지 촛불을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맛있는 칼국수를 먹고 나오는 길에 “촛불 하나 가져가세요”라며 유씨가 촛불을 건넸다. ‘두리반’이라는 글자가 적힌 초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이상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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