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의 법률조항은 내국인 근로자의 고용기회를 보장하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효율적인 고용관리로 중소기업의 인력수급을 원활히 하여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고….”
이주노동자 현실 외면한 합헌 판결
위에서 말하는 법률조항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제25조(사업 또는 사업장 변경의 허용) 4항을 이른다. 고용허가제로 잘 알려진 이 법의 대표적 독소조항이다. 유엔(UN)과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학대, 폭력을 우려하며 고칠 것을 권고했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근로계약을 맺고 국내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는 기본적으로 3년 동안 일할 수 있는데, 이 법 제25조는 고용허가 기간(3년) 동안 사업장을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일정한 조건을 달아 3차례로 제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9월29일 이 조항이 헌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재판관 8명(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자리는 공석) 가운데 재판관 4명이 “내근인 근로자 고용기회 보장과 중소기업의 원활한 인력수급”을 이유로 합헌 의견을 냈고, 다른 1명은 “기본권은 주권자인 대한민국 국민만이 주장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라며 외국인에게는 기본권 침해 구제수단인 헌법소원 청구 자격이 없다며 아예 각하(청구 자격이 없어 사건 청구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음) 의견을 냈다. 2007년 9월21일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 국적의 이주노동자 5명이 헌법소원을 청구한 지 4년 만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합헌 이유로 내세운 “내국인 근로자 고용기회 보장” “원활한 인력수급”이라는 법정 의견(합헌 의견)은 과연 타당한가? 지난 8월 중소기업중앙회 외국인력팀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업체 3천 개를 대상으로 ‘애로사항’을 조사했다. 589개 업체가 답변에 응한 조사 결과는 헌재가 4년 만에 내놓은 합헌 이유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589개 업체중 무려 516개 업체(87.6%)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이유로 ‘내국인 근로자 확보 곤란’을 들었다. ‘노동력을 값싸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응답은 고작 3.7%(22개 업체)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내국인 근로자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제조업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맡고 있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에는 고용기회를 보장해야 할 내국인 노동자가 별로 없다는 얘기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권오현 사무처장은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사업장을 이동한다고 해서 한국인 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침범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이 먼저현재 우리나라에는 이주노동자가 70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35만 명 정도는 고용허가제 대상이 아닌 재중동포들이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베트남·인도네시아·타이·스리랑카·몽골·캄보디아·네팔·방글라데시·필리핀 등 동남아 출신들로, 22만~23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들 대다수가 제조업에 종사하고 1만여 명이 농축산어업에 종사한다. 이주노동자운동후원회 정영섭 사무국장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업체는 워낙 저임금 사업장이 많다 보니 노동시장이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양분돼 있다. 일부 건설업이나 식당 등의 서비스업은 외국인 인력대체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있지만, 제조업이나 농축산어업에는 노동시장이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에서는 “오히려 사용자 단체들은 인력 부족을 내세워 이주노동자 쿼터를 늘려달라고 정부에 건의하는 실정인데, 헌재가 이런 현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선고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중소기업의 원활한 인력수급”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을 제한해야 한다는 헌재의 논리도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정 국장은 “이주노동자들이 더 좋은 노동조건을 찾아 사업장을 옮기게 되면 열악한 사업장은 인력을 구할 수 없게 되고, 이런 사업장에 대한 ‘원활한 인력수급’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을 금지해서 강제로라도 일을 시켜야 한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우선 고민해야지 엉뚱하게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응한 업체들은 가장 많이 겪는 애로사항으로 ‘사업장 변경을 위한 태업 또는 꾀병’(311개 업체·53.8%), ‘입국 후 1개월 이내 사업장 변경 요구’(191개 업체·32.4%)를 꼽았다. 사업장 이동 제한을 지금보다 더 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도 403개 업체(68.4%)나 됐다. 권 처장은 “입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거나 사업장 변경을 위해 태업 등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면서도, 사업주 시각으로만 이를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 처지에서는 노동강도나 작업·생활 환경이 한국에 오기 전에 듣던 것과 너무 다를 경우 사업장 변경 요구를 하게 된다. 또 근로계약서와 달리 퇴직금이 없다거나 기숙사 비용을 내야 한다는 식으로 이면계약서를 요구할 때 다른 사업장을 찾게 된다. 권 처장은 “심지어 농기구 만드는 공장으로 알고 입국했는데 농사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한국인 사업주와 이주노동자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선입견’이 많이 작용한다. 몸이 아파도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사업주는 ‘월급 많이 주는 데로 가려고 꾀병을 피운다’고 임의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권리 적용해야
헌재는 이미 2007년 이주노동자도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하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는 결정을 내놓은 바 있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지난해 7월 사업장 이동을 제한한 개정 법률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을 청구했는데 헌재는 4년 전에 청구한 개정 전 법률에 대해서만 판단했다”고 했다. 기본권의 최후 보루라는 헌재가 사실상의 ‘강제노동’을 용인하는 결정을 번복하려면 재판관들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같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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