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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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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꺾은 손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2004년보다 후퇴한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 해마다 수백 명을 감옥에 보내는 결정이 나오던 날, 참담했던 얼굴들
등록 2011-09-08 06:47 수정 2020-05-02 19:26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갑자기 찾아왔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처벌의 근거가 되는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은 2008년 춘천지법을 시작으로 5건이 이어졌다. 앞서 2007년 울산지법은 예비군 훈련 거부에 대한 처벌을 명시한 ‘향토예비군법 15조 8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이렇게 사건의 담당 판사가 해당 법률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헌재의 의견을 잇따라 물었지만, 헌재의 결정은 오래 미뤄져왔다. 병역거부운동 당사자들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야 헌재 결정이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헌재는 지난 8월30일 해당 조항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담당 변호사는 나흘 전에야 통고를 받았다.

오랜 기다림, 갑작스런 결정

» 대구에서 올라온 병역거부자 이준규씨가 8월30일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합헌 결정이 나온 뒤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 대구에서 올라온 병역거부자 이준규씨가 8월30일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합헌 결정이 나온 뒤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판사들이 잇따라 위헌을 제청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2004년 헌재는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해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현재 헌재엔 당시 결정을 내렸던 헌법재판관이 남아 있지 않다. 모두 임기를 마치고 바뀌었다. 1~2심 판사들은 새 헌재에 새 결정을 묻고자 한 것이다. 춘천지법 등은 위헌법률심판 제청의 근거로 국가인권위원회의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 유엔 등의 양심의 자유 침해 통고, 변화된 여론 등을 들었다. 그러나 7년 만에 나온 두 번째 결정은 오히려 첫 번째 결정보다 후퇴했다. 그래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병역거부연대회의)는 결정 직후에 발표한 성명에서 “헌법재판관이 아니라 국방부 관계자가 쓴 결정문 같다”며 “헌법재판소인가 안보재판소인가”라고 물었다.

지난 8월30일 오후 1시, 헌재 앞에 방청권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된 헌재의 결정을 보려고 찾아온 ‘여호와의 증인’이 다수였다. 병역거부자와 평화활동가들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예상보다 빠른 헌재의 결정에 불안해하면서도, 병역법 88조 1항은 몰라도 향군법 15조 8항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헌재 대심판정 앞에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오래 노력해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들이 병역거부자로 징역을 살았던 성우 양지운씨는 “참, 지루한 싸움입니다”라며 악수를 건넸다. 10년째 병역거부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김환태 감독은 헌재의 첫 결정이 나온 7년 전 ‘그날, 이 자리’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날이 흐렸는데, 합헌 결정이 나오고 바로 여기서 양지운 선생님과 신윤동욱 기자가 나눴던 대화가 기억나요. 합헌 결정이 났지만 ‘5년 뒤면 될 거다’ 했었고, 실제로 국회 등에서 흐름이 있어서 되겠다 했는데….” 김 감독은 “나도 여기에 묶여서 다른 영화를 찍기도 힘들다”며 “이제는 짐을 내려놓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만의 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병역거부 공론화 10년을 넘기고, 몇 번의 기대가 수포로 돌아갔다. 국방부의 대체복무제 도입 백지화 뒤에 ‘그래도’ 남은 희망은 헌재의 결정이었다.

이날 재판정에는 지난 6월 병역을 거부해 재판을 받고 있는 이준규씨도 참석했다. 이날 오전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올라온 그는 결정을 앞둔 심정이 “그냥 멍하다”고 말했다. 사람들로 빼곡한 대심판정 방청석 분위기는 마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듯 경건하고 무거웠다. 옆에 앉은 이의 손을 잡은 이,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긴 이도 있었다. 마침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이 결정문을 읽어나갔다. “이 사건의 법률 조항은…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헌법적 법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 입법 목적이 정당하고…따라서 이 사건의 법률 조항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아니한다.”

국제법 존중에 어긋나지 않는다?

결과는 2004년과 마찬가지로 7 대 2 합헌 결정이었다. 이강국·송두환 헌법재판관만이 병역법 88조 1항이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병역법 합헌이 나오자 대심판정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어 이 소장이 향군법 15조 8항에 대해서도 7 대 2 합헌을 알리자, 방청석의 심란했던 얼굴들은 참담하게 굳었다. 향군법에 위헌 결정을 내려 병역법 위헌으로 가는 ‘다리’라도 놓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날 헌재의 결정은 2004년에 견줘도 후퇴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도, 헌재재판관 5명의 의견으로 국회에 입법을 통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이번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병역거부연대회의 성명은 “고뇌의 흔적조차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안보 논리는 여전했다. 나아가 헌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한다고 하더라도 국제법 존중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헌법 제6조 1항에도 위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병역거부연대회의는 “2006년부터 유엔이 한국 정부에 자유권 규약 위반에 대한 시정권고를 해왔고, 병역거부자 100명에 대한 유엔의 개인 통보가 나왔다”며 “국제 인권규약에 대한 헌법재판관들의 결정은 누가 읽어볼까 민망한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었다. 결정이 끝난 다음, 대심판정 주위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병역을 거부해 항소심 선고를 기다리는 아들과 함께 헌재 결정에 희망을 걸고 찾아온 어머니는 뭐라고 아들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병역거부연대회의는 결정이 나오자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병역거부 변론을 맡은 염형국 변호사는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박진옥 캠페인사업실장은 “국제앰네스티를 대신해 깊은 실망을 표한다”며 “신념에 반해 강제복무를 강요당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강조했다.

병역거부자의 절망은 깊었다. 막 출소한 병역거부자 현민씨는 “병역거부는 제 인생에서 가장 동요하고 불안했던 결정”이라며 “헌법재판관들이 그토록 담담한 목소리와 근엄한 얼굴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고민에 대해 그토록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나중에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합헌 결정으로 감옥에 가야 하는 병역거부자 이준규씨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솔직히 기대는 안 했습니다. 그래도…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나오면 축하한다고 술 사주던 친구들 기억이 납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훨씬 못한 판결을… 제가 감옥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7년, 또 다른 20대가 저처럼 젊은 날을 군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끔찍합니다.”

수천 명을 감옥에 보내는 가혹한 결정

여호와의 증인 대변인 논평은 “2004년 이후 7년 동안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약 5천 명에 가까운 선량한 젊은 청년들이 혹독한 형을 선고받아왔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결정으로 해마다 500~900명의 청년이 감옥에 갈 것이다. 지난 60여 년 동안 병역거부자 1만6천여 명은 3만1천 년이 넘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세계병역거부자운동단체 ‘전쟁저항자연합’(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상징은 ‘총을 꺾는 손’이다. 헌재는 이렇게 총을 꺾는 손의 희망을 꺾었다. 지난 7월, 김부겸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법안이 반전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을까.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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