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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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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중단된 ‘한진중 바캉스’

85호 크레인 앞 푸른 작업복의 ‘스머프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다 서울 농성장 철거 소식에 하루 빨리 올라온 짧은 휴가기
등록 2011-08-10 17:33 수정 2020-05-03 04:26

지난 6월11일. 그날 이후 이 지독한 중독 증세가 시작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감으면 순간순간 1차 희망의 버스 때 장면이 떠오른다. 담장 위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던 모습부터 “매일 마음속으로 살아서 계단을 내려가는 연습을 했다”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마지막 연설까지. 하지만 결정적 장면은 따로 있었다.

크레인 아래의 ‘김진숙들’

7월30~31일 1박2일의 제3차 희망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간 참가자들이 김진숙씨가 있는 85호 크레인에서 들리도록 크게 함성을 지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남아서 ‘희망 휴가’를 즐겼다. 한겨레21 박승화

7월30~31일 1박2일의 제3차 희망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간 참가자들이 김진숙씨가 있는 85호 크레인에서 들리도록 크게 함성을 지르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남아서 ‘희망 휴가’를 즐겼다. 한겨레21 박승화

동이 터올 무렵, 아드님이 치료비 걱정에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있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야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울분을 토하시던 용대 아저씨 모습, 를 해맑게 부르던 가족대책위 어린이들의 모습과 “꼭 또 오시라”며 양말을 나눠주던 가족대책위 분들의 손길, 그리고 하루 왔다 가는 사람들이 뭐가 그리 고맙다고 박수를 치며 환송해주시는 조합원분들의 행렬이 이 중독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크레인 위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러 갔던 그곳에서, 나는 크레인 아래의 더 많은 ‘김진숙들’을 보았다. 그 모습들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완전히 철회되기 전에는 절대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임을, 아니 내려올 수 없을 것임을 말해주었다.

그 뒤 정권과 사 쪽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나처럼 이 투쟁에 중독된 사람들은 기꺼이 주말을 반납하고 모든 재능을 동원해가며 한진중공업 투쟁에 자신의 희망을 엮어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모인 2차 희망의 버스가 부산 영도구 봉래동 사거리에서 최루액에 범벅이 된 채 끝나자, 매번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왔다가 해가 뜨면 돌아가야 하는 발걸음이 너무 아쉬웠다. 영도 거리 한복판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집에 돌아와 우울해하는데 어느 날 친구가 ‘한진중 바캉스’를 가자고 제안했다. 반가운 제안이었다. 우리는 3차 희망의 버스가 끝나고 영도에 남아 한진중공업 앞에 텐트를 치고 2박3일의 바캉스를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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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난 7월30일 3차 희망의 버스. 대한어버이연합 어르신들의 무차별적 폭행과 경찰의 대책 없는 봉쇄작전을 뚫고, 1만5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산 넘고 바다 건너 모인 3차 희망의 버스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퀴어버스와 무지개버스 참가자들은 밤새 피곤한 눈을 비비며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천을 오리고 꿰매어 가로·세로 3m짜리 퀼트 작품을 완성했다. 분홍색 희망의 버스 위로 무지개가 떠오르는 그림이었다.

우리는 그 퀼트 작품을 김진숙 지도위원과 크레인 위의 사수대 분들에게 보여드려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부산에 남았다. 전날 밤 경찰들로 가득 찼던 한진중공업 앞은 애써 찾아온 손님들을 한 번 맞아보지도 못하고 황량하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크레인을 향해 퀼트 작품을 펼쳤다. 마침 크레인 위에서 운동 중이시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우릴 발견하고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예쁘다!” 하고 소리쳐주셨다. 신이 나서 퀼트 작품을 바닥에 펼쳐두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보였다. 크레인을 바라보며 쉼없이 108배를 하는 사람, 맨바닥에 얇은 담요 한 장을 깔고 앉아 하루 종일 그곳을 지키는 사람, 매일 그곳에 들러 조합원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 지나가며 박수를 쳐주거나 먹을 것을 사다주는 사람…. 희망의 버스가 떠나고 황량하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그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멱살잡이도 막지 못하는 중독

크레인 위에서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난간 위를 왔다갔다 하며 운동을 하고 계셨다. 딱 열 걸음이었다. 열 걸음 걸으면 막다른 길, 뒤로 돌아 다시 열 걸음을 걸으면 운전석으로 되돌아오는 그 허공의 난간 위를 수십 번씩 왕복하며 트위터로 사람들의 소식을 꼼꼼히 확인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든다. 크레인 중간 지점에서는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박성호·박영제·신동순·정홍형 네 분의 노동자가 천막을 점검하고 계셨다. 비가 오면 철판 위로 떨어지는 빗물의 소음이 온 정신을 방해하고, 날이 개면 달궈진 철판이 불같은 열기를 뿜어낼 그곳. 먹고 마실 것, 생필품 하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그곳에서 피부에 염증이 나고, 장에 탈이 나면서까지 그곳을 지키고 있다. 크레인 아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들이 보일 때마다 열심히 손을 흔들고, 소리쳐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뿐이다. 그 허공 위에 당장 튼튼한 다리라도 하나 놓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날 밤, 우리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들로부터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감동적인 역사를 듣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무박 2일의 긴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날엔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우산을 들고 크레인이 보이는 상가 앞을 쉬지도 않고 왕복하는 사람이 보였다. 한진중공업 투쟁 이야기를 듣고 핀란드에서 온 여성이었다. 며칠째 그렇게 하루 종일 그 앞을 오가며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서울의 재능교육 농성장 등 여기저기서 강제 철거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마음이 급해져 예정하던 휴가를 하루 당겨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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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30일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부산 영도구 청학동 앞 도로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풍등을 날리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 7월30일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부산 영도구 청학동 앞 도로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풍등을 날리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 문득 내가 언젠가부터 이 지독한 중독을 통해 치유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부와 사 쪽, 보수 어르신들은 희망의 버스가 마치 김진숙이라는 한 사람에게 반한 ‘트위터리안’(소셜 네트워크 트위터 사용자)들의 집단소풍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미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공농성과 용역·공권력의 무차별적 폭력, 끊임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을 목도해왔다. 이제는 그 누구라도 그 행렬에 놓일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동안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죽음이 없어야 한다는, 다음 차례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 마음은 아무리 용역과 공권력을 동원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트위터를 막고, 어르신들의 멱살잡이와 폭행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희망의 버스를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을 얻고, 그로부터 큰 위로와 치유를 받고 있으니까.

다음은 웃고 오는 버스로

3차 희망의 버스를 준비하며 모두들 “꼭 빨리 해결돼서 이번 버스가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딱 한 번만 더 갔으면 좋겠다. 이번 버스는 ‘울고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로 하고, 이 투쟁이 승리한 뒤에 모두가 다시 모이는 ‘축제의 버스’로 4차 희망의 버스가 준비됐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모인 그 조선소 안에서, 1차 희망의 버스 때 울분을 토하던 용대 아저씨도, 한진중공업 투쟁의 역사와 그 부채감을 온몸으로 안고 있는 한스 아저씨도, 그 험한 폭력과 회유, 숱한 갈등을 이겨내고 끝까지 투쟁의 자리를 지켜온 모든 조합원들도, 기계 부품처럼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끼워 맞춰지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거리로 쫓겨난 모든 해고자들과 필리핀 수비크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까지 모두 모여 이날만큼은 모처럼 신나게 웃으며 축제를 즐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엔, 김진숙 지도위원이 85m 크레인 아래로, 매일 마음속으로 연습했던 그 계단을 천천히 밟고 내려와 우리와 함께 지상에서 “끝까지, 웃으며, 함께, 투쟁!” 하고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이 지독한 중독은 그때에야 나를 편히 놓아줄 것이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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