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의 민주당 비공개 회의 녹취록 공개로 촉발된 도청 의혹 사건이, 의혹의 핵심 고리인 한 의원이 국회 일정을 이유로 외유 중인 가운데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민주당의 고발로 이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지난 7월8일 오전 도청과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방송 장아무개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해 컴퓨터와 스마트폰, 녹음기 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한국방송, 도청행위 자인한 셈
영등포경찰서 쪽은 “압수수색영장에 기재한 혐의는 (민주당이 고발한 내용과 동일한) 통신비밀보호법의 도청”이라며 “노트북·녹음기의 경우 지운 파일까지 다 살려볼 수 있어 녹취를 했는지, 녹취록이 있는지, 회사와는 어떤 지시사항을 주고받았는지 분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방송의 수신료 인상 문제와 관련해 이해 당사자인 한국방송 기자들의 취재 행태가 입길에 올랐다. 한국방송 내에서는 “도청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그라운드제로’ 상태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겨레 박종식
이날 경찰의 압수수색은 예상 수위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한국방송을 포함한 언론계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한국방송 정치외교부 국회팀에서 민주당을 출입해온 장 기자는 회의 당일 미심쩍은 행적으로 일찌감치 수사선상에 올랐으나, 경찰은 그동안 장 기자에 대한 소환 수사를 마지막 단계로 미뤄왔다.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를 수집한 뒤 최종 확인 단계에서 소환하겠다는 의도였다. 기자와 언론기관에 대한 수사라는 부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일부 자료는 장 기자의 입회하에 분석할 예정이어서 사실상 소환조사나 다름없다. 언론계와 정치권 주변에서는 경찰이 소환조사 못지않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압수수색을 법원의 영장을 받아 집행한 것을 보면 이미 정황증거 이상의 물증을 확보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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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당대표실 불법도청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천정배 의원)는 7월8일 성명을 내어 “경찰은 이미 KBS 기자의 도청 혐의에 대해 상당한 객관적 근거를 갖고 법관까지 설득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며 “KBS가 국민 앞에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진실 규명을 위한 수사에 자진 협조하지 않을 경우 강제로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길로 접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방송은 보도본부 명의의 ‘경찰 수사에 대한 입장’을 통해 “압수수색이 뚜렷한 증거도 없이 특정 정치집단의 근거 없는 주장과 일부 언론 등이 제기한 의혹에 근거해 이뤄졌다”며 “언론기관 KBS에 대한 모독이자 언론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반박했다.
한국방송의 주장대로 근거 없는 주장과 의혹에 따른 압수수색이라면 언론기관에 대한 모독이자 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한국방송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사건 초기 민주당은 도청 의혹의 주인공을 ‘이해 당사자’로 지목했다. 그러자 한국방송은 지난 6월30일 “KBS는 수신료 문제의 당사자로서 이와 관련된 국회 논의를 적극적으로 파악”했지만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 행위를 한 적은 없다”고 대응했다. 이는 한국방송이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 행위’는 아닐지라도 공개적으로 밝히기 힘든 방식으로 기자들을 동원해 자사의 이해가 걸린 정보를 모았다는 점을 자인한 모양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국방송의 공식 견해만 뜯어봐도 특정 정치집단의 근거 없는 주장과 일부 언론이 제기한 의혹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어떻게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를 녹취록을 작성할 정도로 몰래 기록하거나 엿들었는지가 이번 사건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이 녹취록이 실제 한선교 의원이 공개한 녹취록과 동일한 것인지, 한 의원에게 건네졌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넘겨졌느냐는 점이다.
경찰과 민주당 쪽의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경찰의 수사 방향도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자료를 분석하는 동시에 한국방송 내 정보 보고 라인을 찾는 데 맞춰진 것으로 전해졌다. 장 기자의 도청 혐의는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어디로 보고했는지, 그 보고가 지나가는 계선을 파악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이는 경찰 수사가, 한국방송이 민주당의 비공개 회의를 도청했고, 도청한 자료가 한나라당으로 건네졌다는 전제 아래, 어느 선에서 누구를 통해 샜는지를 파악하는 단계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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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천정배 의원은 “불법도청 진상조사위가 지난 6월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속기록을 분석한 결과, 한선교 의원 외에 다른 의원들도 문제의 녹취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한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한나라당의 조직적인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천 의원은 또 “KBS 사내보고용으로 작성한 녹취록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고, 이런 과정에 김인규 사장을 포함한 최고위급 임원의 의사결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재기자의 녹취록이 정치외교부장과 보도본부장 등 데스크를 거쳐 핵심 경영진에게 전달된 뒤 한나라당으로 넘어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도청 혐의를 받고 있는 장 기자가 국회 출입 경력이 짧은 ‘말진’ 기자여서 정당 또는 국회의원과 ‘직거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녹취록이 나온 곳으로 추정되는 한국방송 쪽은 강한 반발이 있음에도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반면, 이를 건네받은 것으로 의심받는 한선교 의원은 수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한 의원 태도로 미뤄볼 때, 앞으로도 명확한 증거를 들이밀지 않는 한 스스로 입을 열지는 않을 듯하다.
한 의원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출석과 자료 제출 요구에 뚜렷한 답을 하지 않은 채 지난 7월2일 출국해 7월13일께 돌아올 예정이다. 이에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경찰이 한국방송 기자를 수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의원이 직접 입을 열어 진상을 밝히면 된다”며 한 의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한 의원의 외유가 대응책을 찾느라 길어질 수도 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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