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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아들, 행방불명된 진실

1988년 5월 수사기관의 사찰 받던 중 실종된 안치웅씨… 23년 만에 열리는 장례식 뒤로 여전히 밝히지 못한 사건의 진상
등록 2011-06-01 14:24 수정 2020-05-03 04:26

한낮의 최고 기온이 26.3℃에 달했던 1988년 5월23일, 한 청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날 오전 9시께 집을 나선 안치웅씨는 지금껏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 당시 대우어패럴 농성 지원투쟁 가담 혐의로 같은 해 6월29일 구속돼 김해교도소에서 1년여 수감됐다 출소했다. 그 뒤로 줄곧 수사기관의 사찰과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의문의 실종이었다. 23년이 흘렀다. 무심한 세월이다.

주검 없이 치러지는 초혼장

1988년 2월 안치웅씨의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사진. 3개월 뒤인 5월26일 그는 실종됐다. 23년이 지났지만, 안씨 실종 사건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 제공

1988년 2월 안치웅씨의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사진. 3개월 뒤인 5월26일 그는 실종됐다. 23년이 지났지만, 안씨 실종 사건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 제공

5월29일 모교인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주검 없는 그의 초혼장이 치러진다. 그를 잊지 못하는 선후배가 ‘민주열사 안치웅 장례위원회’를 꾸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린다. 실종 23년 만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초등학교 이래 전교 1·2등을 도맡던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는 1982년 4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무역학과)에 입학하며 삶의 변화를 겪는다.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며 이른바 운동권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의 권유로 같은 동아리에 가입했던 대학 후배 남택범(48)씨는 안치웅씨를 수줍고 온화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운동권은 거칠고 강퍅한 사람이 많았는데 치웅이 형은 얼굴에 홍조를 띤 침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었어요.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조근조근 설득하는 타입이었죠. 그래서 후배들이 많이 따랐어요.”

1984년 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와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등에 가담한 그는 이내 학내 운동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83년 광주항쟁 관련 유인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관악경찰서에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그에게는 줄곧 수사기관의 사찰과 감시가 따라붙었다. 그가 관여한 민추위의 인물들이 학생운동의 핵심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강동서 정보과 서무이던 ㅇ씨는 “당시 안씨 성을 가진 서울대생에 대해 정기적으로 상부에 보고했던 기억이 난다”고 증언해, 안씨의 실종에 국가기관이 개입했을 개연성에 무게를 더했다.

실종을 납득할 수 없던 23년 동안 유족은 그를 찾으려 부단히도 애썼다. 그 길은 행방불명에서 시작돼 의문사로 귀결됐다. 실종된 지 달포가 지난 1988년 7월13일 유족은 에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의 근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식은 없었다. 민주화됐다는 2000년대에 유족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을 신청하는 한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두 위원회는 기각 결정과 진상규명 불능을 통보해왔다. 안씨의 실종에 개입했다는 공권력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실종과 그리 무관해 보이지 않던 국가가 그의 실종에 대해 의문사도 아니고, 민주화운동 관련도 아니라고 답한 셈이다. 유족은 의문사위를 잇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도 진실규명 신청을 냈으나 2009년 신청을 취하했다. “국정원, 기무사 등 가해 기관을 직권조사하지 않는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치웅의 과거는 청산되지 못했다. 유족의 2주간 농성으로 지난해 7월10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안치웅씨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방불명자로 인정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슴이 미어져 잠도 못 자”

안치웅씨의 어머니 백옥심(73)씨는 “억울함을 풀어준다던 위원회조차 우리에겐 야속하기 그지없었다”며 “민주화운동 관련 행방불명자 인정마저 아들의 명예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워 이뤄낸 결과”라고 했다. 착하고 순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수의를 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실종된 이후 하루도 아들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어. 보고 싶고 가슴이 미어져서 밤에 잠도 못 자요. 그동안의 설움을 어떻게 말로 혀.” 주검 없는 23년 만의 장례 앞에서, 그의 실종과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 할 국가는 오늘도 아무런 말이 없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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