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다. 개나리가 속절없이 피었다. 무너져내린 슬레이트 지붕, 휑하니 뚫려버린 시멘트벽을 어찌하지 못하고 저 혼자 노랗다. 아직 남아 있는 한 집에서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투쟁가는 자꾸만 허공에 발을 헛디디고 만다. 2008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집들이 철거된 터라 동네 반은 이미 폐허 상태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집들이 흔적만 남은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손을 모아 쥐면 그 안에 폭 담길 것만 같은 작은 동네에 5년 전만 해도 450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없어도 마음은 진짜 재벌 못지않았어.” 아이들만 두고 나와도 걱정이 안 됐다는 평화롭던 동네를 40명 남짓 남은 주민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켜켜이 아픈 기억들이 쌓였다.
법의 정의가 파괴한 평화그 기억들을 구구절절 전할 수도 없거니와, 전해도 철거촌의 흔하디흔한 기억 중 하나가 될 뿐이라는 게, 속상하다. 지난 4월에도 그랬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동네를 찾아와 부활절 미사를 올린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용역들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사람을 내쫓고 집을 부수는 현장을 취재하려고 기자들도 많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철거촌의 하루하루는 기삿거리가 되지 않고, 기삿거리가 될 만한 폭력과 부상, 또는 입에 담기 조심스러운 그 이상의 사건은 현장에 없었기 때문일 거다. ‘사건’은 도래하지 않았다.
45년 동안 살아온 기억들을 어지럽히며 동네에 먹구름을 드리운 것은 개발이다. 동네 안으로는 구급차 한 대 들어갈 수 없는 이곳이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때는 2007년이다. 그 뒤 이 일대의 땅을 ‘세아주택’이 샀다. 세아주택은 주민들을 내쫓고 집을 철거하려고 소송을 진행했다. 주택재개발구역 지정을 취소하는 소송도 걸었다. 무허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사업을 원활히 추진하려고 뇌물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그동안 뇌물 수수 사건은 있었지만 강제퇴거 사건은 없었다. 주민들이 수십 년간 살아왔지만 남의 땅이었다는 것, 그것은 ‘사건’이 되지 못했다. 땅주인은 자기 땅에 무허가로 집을 지어 살던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했다. 집에서 사람을 강제로 쫓아내는 일은 법원에서 권한을 부여받아야만 할 수 있는데, 법원은 땅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주인이니까. 버려진 땅이었고, 그 땅을 일궈 마을을 만든 것이 주민들이었고, 그들이 전세보증금 500만원을 돌려받아도 갈 곳이 없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이 땅주인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주민들은 불법 점유자가 되어버린다. 여느 개발구역에서나 있는 일이다. 평생 살아온 집이 눈앞에서 무너져내려도, 용역들한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아도 주민들의 잘못이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디서 생떼거리냐”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 모욕이야말로 중요한 사건인 것을 법은 끝내 보지 않는다. 법이 언제 어디에서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재산권이 절대선은 아니다1948년 대법원은 세입자의 손을 들어줬다. 인력거를 몰거나 새우젓을 팔며 근근이 사는 세입자들이 그 집을 나가면 갈 곳 없어 거리를 헤매며 당장 굶을 처지고, 집주인은 이미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어 반드시 내쫓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취지다. 수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소는 남의 땅을 무단 점거한 홈리스 4만 명이 쫓겨나 거주할 곳이 없다면, 거기서 살 권리가 있다고 결정했다. 재산권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이들을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적어도 헌법재판소가 내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다.
상도4동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땅이 남의 땅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고작 등기부등본에 있는 권리자 이름을 확인해주려고 법원이 있는 것은 아닐 게다. 남의 땅이라고 아무 대책 없이 쫓아내도 되는가, 그렇게 쫓겨나는 걸 국가는 멀뚱멀뚱 쳐다만 봐도 되는가, 이런 인권의 질문을 길어올려야 한다. 개나리는 법 없이도 피었다. 아니, 법이 없어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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