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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아름답고 역사는 사라진다?



서울 남산의 일제 통감관저 복원해 역사적 교훈 얻자는 제안에 여전히 귀 막고 있는 서울시
등록 2010-08-26 22:42 수정 2020-05-03 04:26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로 가는 길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나무 사이의 터가 통감관저 자리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로 가는 길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나무 사이의 터가 통감관저 자리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꼭 100년이 지났다. 100년 전 8월29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한일합병조약)을 공포했다. 모두 8개 조로 구성된 조약의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대한제국을 포함해 519년간 이어진 조선의 역사는 1910년 8월29일 막을 내렸다.

100년 전 경술국치의 현장을 우리 역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억지로 순종의 위임장을 받아낸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합병의 도장을 찍은 장소는 통감관저 2층의 데라우치 침실이었다. 통감관저는 한일합병 직후 총독관저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다시 민속박물관(1946)과 임시 국립박물관(1953)으로 쓰인 통감관저에 관한 기록은 1960년대 이후 사라졌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통감관저가 있던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에 중앙정보부를 설치한 것이다. 일반인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변하면서 통감관저의 기억도 희미해졌다.

표석 이름마저 통감관저 지우고 ‘녹천정 터’로

은 지난해 ‘남산을 평화공원으로’(774호 표지이야기)와 ‘남산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776호 특집) 기사를 통해 통감관저 복원과 옛 중앙정보부 건물 보존의 필요성을 조명했다. 사라진 역사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시민 모임인 ‘역사를 여는 사람들 기억(ㄱ)’(이하 ‘기억’)의 출범 소식과 활동 계획도 소개했다. 1년이 지났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우리 요구는 간단합니다. 통감관저 복원과 옛 중정 건물 보존, 그리고 이를 위해 서울시와 함께 공청회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이죠. 통감관저 등 역사적 공간을 왜 보존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다 설명했습니다. 100쪽이 넘는 자료도 부쳤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달랑 한 장짜리 답변이 왔습니다. ‘서울시 행정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끝.’ 이런 모욕적 공문이 어디 있습니까.”

‘기억’에 참여하고 있는 소설가 서해성씨는 8월19일 지난 1년의 활동을 정리하며 서울시를 향해 섭섭함을 토로했다. ‘기억’이 남산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도 사실 서울시 때문이었다. 서울시가 2009년 3월 남산의 중앙정보부 건물을 철거하고 녹지를 만드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하자 각계 인사들이 크게 우려했다.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건물일수록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서울시와 시민사회 양쪽의 주장이 가장 엇갈리는 지점은 통감관저에 대한 입장이다. 시민사회 주장과 달리 서울시는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한일합병조약의 불법성을 논의하는 마당에 조약이 이뤄진 장소를 기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반면 중앙정보부 건물 보존에 대한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희망적이다. 2009년 3월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할 때만 하더라도 중앙정보부 건물 철거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중앙정보부 건물 4개 가운데 ‘6국’이 있던 균형발전본부 청사는 2009년 철거를 완료한다는 것이 서울시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 허물어질 것으로 보였던 중앙정보부 건물은 2009년 말 서울시가 “균형발전본부 청사 철거를 내년 6월 이후로 늦추기로 했다”고 발표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중앙정보부 건물을 무분별하게 철거해서는 안 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앙정보부 건물 보존은 논의 가능성 있어

백현식 서울시 남산르네상스 담당관은 8월19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서울시) 청사 이전 등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어 중앙정보부 건물 철거 계획을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하지 못한 상태”라며 “지금으로서는 철거를 언제부터 시작할지 알 수 없으나 아직 먼 이야기”라고 말했다. 백 담당관은 또 “지난해 시민사회단체와의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지만 서울시는 중앙정보부 건물 처리와 관련해 얼마든지 시민사회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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