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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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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식민지화는 없다”



반성도 책임도 없는 일본 총리의 한일병합 100년 담화…식민지배 자체가 범죄행위라는 인식 선행돼야
등록 2010-08-20 16:21 수정 2020-05-03 04:26

기억에 관한 실험 가운데 인상적인 게 있다. 정상인과 기억상실증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이다. “당신은 지금 해변의 모래사장 위에 서 있습니다. 앞에 무엇이 펼쳐져 있을지 3분간 상상해보세요. 뭐가 보이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정상인은 별문제 없이 미래를 상상했지만, 기억상실증 환자는 미래를 상상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연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를 도출했고, 이는 ‘기억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두는 대뇌 활동이 아니라 매 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다시 드러내는 것은 현재적 관점에 따라, 또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8월10일 일본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올해가 제국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빼앗아 식민지로 만든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인 만큼 일본 총리의 담화는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간 총리는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기분(심정)을 표명”한다면서 실천 방안으로 재사할린 한국인 지원과 유골 반환 지원, <조선왕실의궤> 등 문화재 반환을 내놓았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담화 내용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지난 100년의 잘못된 일을 기억하고 반성하겠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1995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사죄 담화보다 나아진 게 없다. ‘통절한 반성’을 실천할 방법으로 내놓은 것도 문화재 반환을 빼면 기존의 것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맹이 없는 ‘100년의 담화’였다.
한 국가와 민족의 주권을 빼앗고 존엄성을 훼손하며 폭력과 학살, 차별로 노예적 삶을 강요한 식민지배의 역사가 그렇게 가볍게 한마디의 반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더구나 그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가 해결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계속되는데도 이에 대한 언급과 해결 방안을 내놓지 않는 것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실천적 방안 없는 ‘통절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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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것은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두고 보인 한국 정부의 태도다. 한국 정부는 이 담화로 마치 한-일 과거사 문제가 해결된 양 환영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65년이 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 식민지배 피해는 그 목록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한-일 과거 청산 문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B~C급 전범,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잔류자,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 유골, 여자 근로정신대, 군인·군속, 강제노동, 원폭 피해자, 그리고 식민주의의 가장 큰 폐해라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한국인 차별이 있다. 여기에 식민지화나 지배 과정에서 벌어진 각종 민족 학살과 인권 탄압은 아직 그 실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당초 논란거리로 삼지 않겠다는 심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부의 이런 태도는 옳지 못하다. 만일 언론 보도처럼 한국 정부가 간 총리의 이번 담화로 한-일 과거사 문제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역사에 죄를 짓는 행위다.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부적절한 처사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마저 깨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이 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명시된 징용과 징병 등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일본 쪽에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더라도, B~C급 전범, 원폭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재일한국인,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잔류 한국인 등 한-일 협정 당시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문제를 두고 한국 정부가 협상에 나서는 것이다. 조약법상의 착오, 사정 변경 등을 이유로 일본 정부에 요구하면 될 것이다. 실례로 1960년 독일-프랑스의 포괄협상 과정에서 모든 청구권에 대해 완전타결 규정을 두었으나, 이후 프랑스가 강제징집자 등에 대해 추가 보상을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독일이 1981년 3월 독-프 이해 증진 명목으로 ‘독-프 이해증진재단에 대한 출연조약’을 만들어 2억5천만마르크를 출연했다. 협정을 개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정치적 타결을 이끌어낸 셈이다. 적어도 이런 수준이 돼야만 한-일 과거사 문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간 총리의 담화에 대해 한국 언론의 대응도 자못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언론은 언제부터인가 ‘한국병합조약’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번 담화를 놓고도 간 총리가 조약의 불법성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 문제는 의미가 있다. 일본이 불법 지배를 인정한다면, 식민지배하에 일본법의 이름으로 시행한 모든 행위가 불법이 되고, 그에 따른 배상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일 지식인 사이의 공동선언도 이 병합조약의 부당함에 초점을 두고 나왔다. 한-일 지식인 사이에 이 정도로 공동의 역사 인식을 끌어낸 것은 뜻깊은 일이다.

병합조약의 불법성 논의가 지닌 한계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한국병합조약’이 불법이고 무효라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이므로 배상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미 1965년 한-일 협정 당시에도 치열하게 다툰 사항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에 강요한 조약은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한국은 주장했고, 일본은 당시로는 유효했다고 주장했다. 논란 끝에 ‘한-일 기본조약’에 ‘이미 무효’라고 써 문제를 봉합해버렸다. 각자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조약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만일 ‘한국병합조약’이 당시의 국제법 수준에서도 불법이고 무효임이 증명된다면, 이것을 가지고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다시 한-일 협정을 체결하자고 요구해야 한다. 아니면 조약 해석상 중대한 차이가 있고 이 차이가 피해자 구제 문제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 해석을 일치시키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결국 병합조약의 불법성 문제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일 협정 개정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것이 함께 다뤄져야만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에서 힘을 받는 논의로 발전할 수 있다.

또 하나, 국제법이 가진 이중성 문제다. 당시의 국제법이란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진 국가 간의 규칙이긴 하지만, 그 중심은 제국 열강이었다. 비유하자면 ‘늑대들끼리의 게임 규칙’이었다. 이것을 양들에게 적용하면 사태는 전혀 달라진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으면서 도장을 찍네 마네 하는 형국에서 도장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양이 최소한 늑대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추궁이 현실성을 가지려면 양이 늑대처럼 힘이 강해지든가, 아니면 늑대가 양처럼 순화돼야 한다. 전자의 길은 같이 제국주의로 가는 방식이요, 후자는 기존 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후자는 늑대들끼리의 규칙을 양들과 공존할 수 있게 전혀 새롭게 짜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8월11일 이순덕·강일춘 할머니가 930차 수요집회를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8월11일 이순덕·강일춘 할머니가 930차 수요집회를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식민주의=반인도적 범죄’가 국제적 흐름

병합조약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춘 한-일 지식인 선언이 갖는 의미는 크지만, 자칫 잘못하면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후자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만약 ‘한국병합조약’이 당시의 국제법상 절차나 형식의 문제가 없었다면, 일제의 식민지배가 정당화되고 합리화될 수 있을까. 국제법상의 논쟁이 갖는 의미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식민지배를 강요한 조약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식민지배 그 자체가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제사회에서 논의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은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 소중한 자산이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및 이와 관련한 불관용 철폐를 위한 세계회의’에서는 ‘더반 선언문 및 행동 프로그램’을 채택함으로써 식민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규정한 더반 선언은 “식민주의는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및 이와 관련한 불관용으로 이어져왔으며, 아프리카인, 아프리카계 사람들, 아시아계 사람들, 선주민들은 식민주의의 피해자였고 계속 그 결과의 피해자임을 인정한다. 식민주의로 인한 고통을 인정하며, 발생 장소와 시기에 관계없이 식민주의는 비난받아야 하며, 그 재발이 방지되어야 함을 확인한다”고 밝혔다. 반인도적 범죄인 노예제의 근원으로서 식민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같은 해 2월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아지역준비회의에서 채택한 선언은 “식민지배나 기타 형태의 외국 지배 혹은 외국 점령, 노예제, 노예 매매, 그리고 인종 청소 등 인종 혹은 민족 우위를 기초로 한 정책이나 관행을 수행한 국가는 그러한 정책이나 관행의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배상해야 함을 인식한다”고 밝혔다. “죄 없는 식민지화 따위는 없고, 죄를 뒤집어쓰지 않는 식민지화 같은 것도 없다”는 프랑스 문필가 세제르의 말처럼 식민지배는 명백히 범죄행위다.

2002년 세워진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설립 근거가 된 로마협약 7조는 ‘인간성에 반한 죄’를 규정하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저지른 행위에 이 조항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학살, 3·1운동 때의 광범위한 탄압과 학살, 그 뒤 간도 학살,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등은 ‘살인과 섬멸의 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강제연행 및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노예화·강제이송·강제노동의 죄’에 해당한다. 이런 범죄행위는 모두 일본의 식민주의 정책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식민주의 자체가 폭력과 차별에 기초한 억압 체계이자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

 

피해자 구제 입법운동 등 실천 필요해

한-일 과거사 문제로 씨름해오던 시민단체들은 식민지배의 역사적 의미를 정립하고, 단체별 또는 현안별로 진행돼온 한-일 과거 청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연대기구를 만들었다. ‘식민주의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 실현’을 위해 2010년 1월과 3월에 각각 결성된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와 한국실행위원회는 식민지배 자체가 범죄행위이며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하고, 당면 과제로서 피해자 구제를 위한 입법운동 등을 실현해나가기로 합의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으로 인권, 평화 그리고 상호존중이 실현되는 새로운 한-일 간의 100년은 식민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그 유산을 극복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새로운 이념과 실천이 필요한 때다.

김민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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