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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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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정치, 엄숙함 벗고 발랄 진화 중



고등학생들의 희생으로 결실 맺었던 4·19 혁명 50주년…
2010년 최대 청소년 운동단체인 ‘아수나로’를 만나다
등록 2010-04-22 22:13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월5일 졸업식이 열리는 경기 수원의 한 학교 입구에서 아수나로 수원지부 회원들이 학교 졸업식을 감옥 출소식에 빗대 두부를 먹는 행위극을 펼치고 있다. 연합 신영근 기자

지난 2월5일 졸업식이 열리는 경기 수원의 한 학교 입구에서 아수나로 수원지부 회원들이 학교 졸업식을 감옥 출소식에 빗대 두부를 먹는 행위극을 펼치고 있다. 연합 신영근 기자

올해로 4·19 혁명 50주년이다. 4·19는 원래 고등학생들의 혁명이다. 1960년 2월28일, 이승만 정부가 초·중·고생을 강제로 등교시켰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학생들의 야당 선거유세장 참석을 막으려는 꼼수였다. 대구고·경북고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며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벌였다. 이를 뒤따르는 학생 데모가 전국으로 번졌다. 3월15일, 마산에서도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 참가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행방불명됐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마산고·마산상고·마산공고·마산여고 등 학생 3천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2·28 의거, 3·15 의거를 거친 뒤에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했다. 10대를 만만하게 봤던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 고등학생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4·19 혁명은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font color="#00847C">수첩 속에 알록달록 ‘운동 스케줄’</font>

50년이 지난 2010년, 불의에 항거하는 ‘10대 정치’의 맥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18살 ‘공기’(별명)의 수첩이 하나의 실마리다. “월요일: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회의, 화요일: 인권영화제 회의, 수요일: 청소년 라디오 방송 진행, 목요일: 청소년 인권 관련 기자회견, 금요일: 평화운동가·환경운동가와 미팅, 토요일: 청소년 노동빈곤 실태를 알리는 ‘퍼포먼스’ 참여, 그리고 일요일: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하는 라디오 방송 대담 출연….” 그는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이하 아수나로) 회원이다.

아수나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에 나오는 청소년 조직 이름이다. 사철 푸른 편백나무를 뜻하는 일본어다. 아수나로의 꽃말은 ‘불멸·불사’다. 소설에서 청소년 조직 아수나로는 자신들을 위한 땅을 구해 대안자치국가를 만든다. 청소년의 나라다. 현실 속 아수나로는 아직 나라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행동하고 있다. “청소년 스스로 정당한 권리를 직접 요구하며 실현해가는 사회운동”을 지향한다고 회칙에 밝혔다. “청소년을 정치적 힘을 지닌 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10대가 모여 있다.

직접행동, 대중운동, 청소년 스스로의 운동을 펼친다는 자부심이 이들에게 있다. 지난 2월, 아수나로 회원들은 서울·부산·수원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 행동에 나섰다. 졸업식이 열리는 중·고등학교 앞에서 두부를 먹었다. 학교를 감옥에 은유하고, 졸업식을 출소에 비유했다. ‘출소를 축하하는’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행위극은 아수나로가 즐겨 택하는 직접행동 가운데 하나다. 2008년 10월,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청소년 30여 명이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돗자리를 깔고 길바닥에 누워 잠도 잤다. 2시간 동안 잤다.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작은 시위였다. 일제고사 반대와 도시락·낮잠의 관계는? 당시 아수나로 회원들의 구호가 이랬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아수나로가 발랄한 일만 벌이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아수나로가 벌인 굵직한 사업만 꼽아도 △경기도 교육청 학생인권조례 기획단 참여(10월) △학생인권실태조사 및 발표(11월) △두발자유·체벌폐지 등을 담은 청소년 500명의 집단민원 교과부 제출(11월) △일제고사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서 인권위 제출(12월) 등이 있다. 기존 시민단체의 ‘언론 플레이’를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행동의 대부분은 소리소문 없이 이뤄진다. 이들은 거의 매주 학교 앞에서 캠페인을 벌인다. 회원들이 특정 학교에 몰려가 청소년 인권을 알리는 전단을 나눠준다. 1인 시위도 벌인다. 회원들의 표현을 빌리면 “학교 선생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아수나로 회원을 밀어내지만, 등하굣길 학생들은 교사의 눈치를 보면서도 꾸역꾸역 전단을 받아 읽는다.

‘공기’는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좋은데, 사업이 물밀듯 밀려와 일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싫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 ‘공기’는 ‘10대 정치’의 최일선에 서 있는 요즘이 가장 마음 편하다. 그는 2008년 여름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영화배우 강동원을 좋아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한다. 강동원 팬카페에 가입했고, ‘안티 엠비’ 카페에도 가입했다. 당시 그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광장에 나왔다. 말 그대로 ‘촛불 소녀’였다. 그러다 ‘촛불 어른’의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조계사 농성장을 지지 방문했는데, 함께 와 있던 어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컵라면 심부름을 시키더라고요.” 그 일을 겪으면서 ‘공기’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했다. 그는 촛불 소녀 이전에 인권을 가진 청소년이었다. 친구 ‘따이루’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font color="#008ABD">반말부터 하는 ‘비청소년’ 싫어요</font>

‘따이루’(17·별명)는 스스로 “성격이 지랄맞다”고 말하는 아수나로 회원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수나로 활동을 했다. 그는 싫어하는 게 많다. 강압적인 동아리 선배들이 싫었다. 방송반을 그만뒀다. 당연한 듯 반말부터 하는 ‘비청소년’도 싫다. 아수나로 회원들은 18살 이상의 성인을 ‘비청소년’이라 부른다. 비청소년이 청소년한테 함부로 반말하면 ‘따이루’는 꼬박꼬박 대거리를 한다. 그는 영웅주의도 싫어한다. 모임 대표와 지휘 체계가 따로 없고, 누구든 회원으로 가입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뜻있는 청소년이면 누구나 ‘행동’에 참여하는 아수나로가 그래서 좋다.

2010년 현재 청소년 운동을 표방한 단체는 아수나로 말고도 더 있다.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정치조직 ‘다함께’ 소속인 ‘청소년다함께’, 청소년인문교육공동체 ‘나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인의 개입 없이 청소년 스스로 조직하고 확대하면서, 강연·캠프 등 교육 프로그램이 아닌 직접행동에 초점을 둔 모임은 아수나로가 유일하다. 아수나로의 온라인 회원은 5700여 명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다. 회원 서너 명이 지속적·정기적 모임을 열면 ‘지부’로 인정하는데, 서울·광주·인천 등에 7개 지부가 있다. “회원 중엔 ‘비청소년’이 돼버린 경우도 있고, 우리를 감시하려고 가입한 교사나 경찰도 있다”고 ‘따이루’는 말했다. 아수나로 회원이 원래 이름 대신 별명을 쓰는 것도 회원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각종 모임·퍼포먼스 등에 꾸준히 참석하는 청소년 ‘활동가’는 60여 명이다. 300만 명이 넘는 청소년(13~18살) 인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수지만, 현재 청소년이 처한 조건을 생각하면 주목할 만한 수다. 아수나로는 청소년 상근활동가 60여 명과 청소년 회원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는 셈인데, 이는 기존 시민단체와 비교해도 ‘매머드급’이다. 60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다.

1960년 4·19 혁명을 뒤엎은 군사정권 내내 ‘10대 정치’는 침묵했다. 이들이 한국 사회의 전면에 다시 떠오른 것은 1987~91년이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전개된 대학생 운동과 1985년 발행을 계기로 분출한 교사 운동이 10대 정치의 부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입시경쟁의 압박으로 청소년 자살자가 급증해 1988년 중·고등학생 12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10대 정치의 정서적 바탕을 이뤘다.

민주화운동이 드세지던 1987년, 전국 고등학교에서 두발 자유화·자율학습 폐지·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을 요구하는 수업거부·학내농성·거리시위 등이 시작됐다. 흥사단 서울지부가 개최한 1987년 11월3일 학생의 날 행사에는 중·고등학생1500여 명이 참석해 사실상의 대중집회를 열었다. 1987년 12월 대선 직후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을 자처하는 고등학생 15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6일간 철야농성하기도 했다.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 직후 현직 교사 1700여 명이 강제 해직되자, ‘참교육 선생님 지키기 운동’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비행기 날리기, 수업거부, 교내시위, 단식농성, 거리시위 등을 펼쳤다. 전교조가 집계한 것만 해도 1989년 한 해 동안 250여 개 학교, 연인원 47만여 명의 중·고등학생이 전교조 지지 투쟁에 나섰다. 1988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광주·부산·마산·창원·대구 등 주요 도시에서 ‘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민주고등학생연합’ 등 대규모 학생단체가 속속 결성됐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대구 경화여고 김수경(1990년 6월), 충주고 심광보(1990년 9월), 전남 보성고 김철수(1991년 5월) 등이 고등학생운동 탄압 중단, 참교육 실현,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투신·분신 자살했다.

<font color="#A341B1">‘80년대식 청소년 조직 운동’은 쇠퇴</font>

1990년대 초반, 고등학생 운동이 주춤하면서 권력의 탄압도 본격화됐다. 공안 당국은 1994년 9월, 고등학생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청소년단체인 ‘청소년회 샘’ 간부들을 검거·기소했다.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고등학생만 100여 명에 이른다. 교육부는 ‘고교생 의식화 예방 특별지도대책’을 전국 시도교육청에 내려보냈다. 이를 고비로 전국 곳곳의 직선제학생회·공개동아리·지하소모임 등이 해체됐다. 이후 ‘80년대식 청소년 조직 운동’은 쇠퇴 일로를 걷는다.

대신 ‘온라인 광장’이 새로 등장했다. 1995년 7월, 당시 춘천고 학생 최우주씨가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 소원을 냈다. PC통신 하이텔에 토론방이 개설됐다. 토론에 참여한 청소년 누리꾼이 같은 해 12월 ‘하이텔 중고등학생복지회’를 만들었다. 최초의 ‘온라인 청소년 조직’이었다. 이런 흐름은 2000년 오프라인 조직인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발족으로 이어졌지만, 3년 정도 지속하다 소멸했다. 80년대 방식의 조직 구성으론 21세기 청소년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04년 말 ‘연구모임’으로 시작해 2006년 2월 ‘행동조직’으로 전환한 아수나로는 이런 시행착오를 모두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온라인에서는 평등하고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자발적이되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아수나로는 지난 4년간 각종 청소년 관련 이슈에 빠짐없이 등장해 발언했다. ‘학생’ 대신 ‘청소년’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참교육’ 대신 ‘인권’의 지향성을 굳혔다. 그 결과 학생인권은 물론 청소년의 정치적 자유, 청소년 페미니즘, 청소년 노동, 청소년 정보인권 등 새로운 의제도 계속 개척할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아수나로는 지난 60년에 걸쳐 진화해온 ‘10대 정치’의 첨단이다.

그러나 아수나로의 ‘독보적’ 위상 뒤에는 한국 청소년이 맞닥뜨린 열악한 환경이 숨어 있다. 배경내 상임활동가는 “몇 년 전만 해도 중간고사가 끝나면 아이들이 모여 서로 의논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1년 내내 시험기간이나 다름없어서 모임이 어려워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 활동가가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수나로의 열성 활동가는 입시교육과 청소년운동 가운데 ‘양자택일’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공기’는 고등학교 입학 직후,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다. “나 자신이 되지 못하고, ‘1학년 3반 31번’밖에 안 된다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수나로 활동가 60여 명 가운데 절반이 학교를 그만둔 ‘탈학교 청소년’이다.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정치권력과 맞섰던 4·19의 10대 정치는 이들에게 흐릿한 과거사다. 다만 4·19 세대가 가지지 못했던 다른 힘을 갖추고 있다. “옛날과 달라요. 수천 명은커녕 수백 명 모이기도 힘들죠. 그래도 ‘시대의 양심’을 자처하며 영웅주의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권 문제에 주목한 뒤, 사회 전체 문제로 시야를 넓히면서 평범한 시민의 당연한 권리를 외치는 요즘의 10대 정치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따이루’의 말이다.

4·19 세대 대부분은 이후 현실과 타협했고, 일부는 오늘날 보수 진영의 대부로 통한다. 유신정권 때 등원한 윤식 전 유정회 국회의원, 전두환 정권의 핵심이던 이세기 전 민정당 의원, 노무현 탄핵투표를 이끈 박관용 전 국회의장 등은 4·19 혁명 참가를 자랑했던 인물이다. 4·19 정신의 계승을 표방한 ‘4월회’의 유세희 대표는 현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4월회는 지난 10년간 해마다 ‘4·19 문화상’을 시상해왔는데, 류근일 전 주필,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등에게 그 상을 줬다. 반말과 심부름에 시비를 거는 ‘지랄맞은’ 아수나로 회원이라면 거대 담론을 싫어하는 만큼 거대 타협도 거절할 것이다.

<font color="#638F03">“청소년 교육감, 거리 유세도 할까 해요”</font>

아수나로는 지난 4월14일 끝난 서울시 교육감 민주진보 단일후보 추대위원회에 운영단체로 참가했다. 청소년이 교육감 후보 선정 과정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이들은 한술 더 뜰 예정이다. 추대된 교육감 후보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독자 후보’를 준비하고 있다. ‘기호 0번, 청소년 교육감 후보’다. 가상의 청소년 후보를 등장시켜 ‘법외 선거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우리가 바라는 교육감 공약을 발표하고, 학교 앞에서 학생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하고, 트럭을 빌려서 거리 유세도 할까 해요.” 그 구상을 말하는 ‘따이루’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1960년의 엄숙했던 10대 정치는 가고, 2010년 발랄한 10대 정치가 왔다. ‘비청소년’은 그들에게 어떤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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