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법률 서비스, 밤에는 중단합니다!

<한겨레21>이 소개한 ‘수사받는 법’ 기억하고 청문감사관 요구했으나 퇴짜…
당직변호사도 불통
등록 2009-11-19 16:34 수정 2020-05-03 04:25

서울에 사는 20대 후반의 대학생 김아무개씨는 지난 10월30일 아침 ㄱ경찰서에서 수사받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터진다. 한 여성이 이날 새벽 3시께 길거리에서 김씨한테 폭행을 당했다며 신고하는 바람에 그는 지구대를 거쳐 경찰서까지 간 참이었다. 길에 서 있는데 김씨가 다가와 손목을 갑자기 잡아끄는 등의 폭행을 했다는 게 그 여성의 주장이었다. 반면, 가해자로 몰린 김씨는 술에 취한 그 여성이 새벽 시간에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려고 해 조심하라고 잡아끌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내게 청문감사관을 불러달라”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경찰이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하는 상황. 문제는 경찰의 수사 과정과 김씨가 서울지방변호사회의 당직변호사 제도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그 여성이 피해자 진술을 하는 동안 김씨가 경찰서 형사과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언제쯤 조사를 받을 수 있는지,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지 묻는 그에게 형사들은 “커피 없어” “잔말 말고 가서 앉아 있어”라고 말했다. 왜 반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그에게 형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학이나 다니는 녀석이 나쁜 짓 하고 다닌다”는 투의 수군거림도 들렸다.

형사들이 자신에게 강한 선입견을 갖고 있어 이대로는 제대로 된 수사를 받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김씨는 지난 7월 읽은 769호 표지이야기 ‘완전정복 MB시대 수사 제대로 받는 법’ 기사를 떠올렸다. 당시 기사는 경찰의 수사 방식이나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해당 경찰서의 청문감사관을 찾아 문제를 시정하거나 담당 경찰관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형사에게 ‘청문감사관’을 불러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앉아 있어”라는 반말이었다. 담당 형사에게 청문감사관을 전화로라도 연결해달라고 했으나 “그런 거 없어”라는 얘기만 들었다.

잔뜩 겁먹은 그는 변호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아침 시간에 부를 수 있는 변호사는 없었다. 기사는 그런 때 지방변호사회의 당직변호사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 형사과 의자에 적힌 서울지방변호사회 당직 전화번호(02-3476-8080)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나오라는 변호사는 안 나오고, “자정부터 오전 9시까지는 당직변호사와 통화할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기면 오전 9시 이후 연락주겠다. 급하면 유료 상담을 이용하라”는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씨는 ‘형사가 곧 내게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을 텐데, 조서 작성 다 끝난 뒤 변호사와 연결돼봐야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060’으로 시작하는 유료 상담 번호를 다시 눌렀다. 30초에 1500원이라는 요금 공지 뒤 어떤 남자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씨는 사연을 설명한 뒤 “내가 청문감사관을 불러달라는데 경찰이 불러주지 않는다. 내가 청문감사관을 부를 권리가 있느냐. 형사는 내게 청문감사관을 연결해줄 의무가 있느냐” 등을 물었다. 전화기 너머 변호사는 “세세하게 물어볼 거면 변호사로 선임하라”면서 당장 400만원을 입금하면 경찰서로 달려오겠다고 했다. 대학생인 김씨가 아침 시간에 현찰 400만원을 송금하는 건 불가능한 일. 되레 변호사는 김씨가 청문감사관을 부를 상황은 아닌 것 같다는 무책임한 발언까지 늘어놓았다. 기가 막힌 김씨가 이름을 묻자 변호사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황당했다.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쫄지 마! 실전 매뉴얼이 여기 있잖아.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침까지는 진술거부권 행사해야 하나

김씨는 오전 9시가 넘어서야 청문감사관을 만날 수 있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친 청문감사관은 “일단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찾아오라”고 김씨에게 말했다. 불안해서 그러니 수사받는 동안 옆에 있어달라는 김씨의 요구를 간단하게 거절한 청문감사관은 대신 방전된 김씨 휴대전화의 배터리는 충전시켜주겠다고 했다. 김씨는 결국 피의자 신문조서에 지장까지 다 찍고 오전 10시30분께 경찰서 문을 나섰다. 조사도 끝났는데 청문감사관을 다시 만날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유료 상담 통화료 3만9천원을 내라는 고지서가 김씨 집으로 날아들었다.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전화를 했는데 결국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에 불만이 있을 때 활용하라고 만든 청문감사관 제도는 실제 수사 현장에서 접근이 차단되고, 일과 시간이 아닌 때에 도움받으라고 만든 당직변호사 제도도 김씨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당직변호사 제도는 유료 상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변호사 개인의 수임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일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김씨처럼 새벽에 사건이 벌어져 수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 적절한 법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매우 좁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경우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는 당직 전화번호로 걸면 그날 당직을 맡은 변호사의 휴대전화로 연결되지만, 밤 12시 이후에는 유료 전화를 이용해야 한다. 그나마 김씨의 경우처럼 돈값을 못하기 일쑤다. 당직변호사 제도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상담 전화(국번 없이 132번)도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는 이용할 수 없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02-522-7284)의 경우도 꼭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전 9시가 되기 전까지는 진술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결론이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자정 넘어서는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적어도 전화를 통한 무료 법률 상담 정도는 24시간 가능한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직변호사 전화, 24시간 열려 있어야

이에 대해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인권이사를 맡고 있는 김종철 변호사는 “지방변호사회 예산 부족으로 당직변호사 제도에서 (시간대의) 공백 상태가 빚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한다”고 말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경우 인권과 관련한 1년 예산 3억원 가운데 절반을 당직변호사 제도에 쏟아붇고 있지만, 밤 12시 이후까지 운용할 정도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김 변호사는 설명했다. 정부의 예산 지원은 전혀 없다. 김 변호사는 “개인적으로 060 유료 상담도 올바른 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24시간 법률 상담이 가능하도록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