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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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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법 개정, 노노노노노!

‘노노모’ 노무사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선 이유…
“연륜 느는 만큼 상담 수준도 높아졌으면…”
등록 2009-05-08 16:29 수정 2020-05-03 04:25

“10년 전 노무사를 시작할 때보다 경험과 연륜은 더 늘었어요. 그럼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은 내용의 상담을 해야 할 텐데…(현실은 반대예요). 제가 이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술을 가졌다면, 실제 하고 있는 건 소독과 붕대 매주는 정도인 셈이에요. 법이 갈수록 노동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노무사의 갈림길 ‘누구 손을 들어줄 건가’

장혜진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부회장이 4월29일 점심시간에 국회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문구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장혜진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부회장이 4월29일 점심시간에 국회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문구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4월29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 따사로운 봄 햇살의 세례 속에 장혜진(39) 노무사가 팻말을 손에 든 채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란 글귀가 크지 않은 그의 체구를 가리고 있다. 세상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인데, 사람 사이의 갈등을 규율하는 법은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되레 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이성적 분노의 표현이다.

그를 하루짜리 단식에 참가시키며 이 자리에 세운 건 세 가지다. 첫째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는 이 땅의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이고, 둘째는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돼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에 소속된 그를 몇 달 전 한 여성 장애인 노동자가 찾아왔다. 지난해 한 통신회사의 전화상담원으로 입사한 그 여성은 애초 여덟 달 동안은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회사 쪽에서 받았다. 하지만 막상 기간을 채운 그에게 돌아온 건 계약 해지 통고였다. 장 노무사는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다. 사업주가 말로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건이기에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노무사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노동위는 화해를 주선했다. 사용자 쪽이 추후 채용 계획이 생기면 그 여성을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협의가 이뤄졌다. 장 노무사가 보기에 그 여성은 부당하게 해고됐지만 법이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마지막으로 열린 노동위에서 최후 진술을 요구받은 그 여성이 머뭇거리자 한 위원이 그러더군요. ‘회사에 고맙다는 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 거대한 세상이 100만원짜리 노동자의 생존권을 이렇게 짓밟을 수도 있구나 싶었죠.”

노무사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0년차를 맞은 그는 그동안 분노와 연민을 삭혀오다 이렇게 1인시위를 하면서 겉으로 표현이라도 하게 돼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장 노무사는 “이렇게라도 실천하니까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환란 직후인 1998년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6개월의 수습 기간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했다. 주중엔 지도노무사의 사무실에 나갔는데, 주로 회사 쪽을 상담했다. 주말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무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돈 있는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도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진로 결정을 앞두고 그는 차마 회사 쪽 노무 상담을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기 1명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의 문을 두드렸다. 노무사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차별 시정 명령에 폐업으로 맞선 하청업체

장 노무사를 국회 앞에 서게 만든 세 번째 요인은 바로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노노모)의 회장 이병훈 노무사다. 이 모임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장 노무사가 이날 단식과 1인시위에 참가하기 전, 이 노무사는 15일 동안 내리 밥을 굶었다. 보다 못한 회원들이 하루씩 릴레이 단식농성을 하겠다며 말린 끝에 이 노무사는 단식을 풀었다. 그 사이 몸무게가 12kg 빠졌다. 2002년 결성된 노노모는 기업 쪽 사건 수임은 하지 않는 노무사 100여 명이 모인 단체다. 그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모순 덩어리다. 이 노무사가 곡기 채우기를 스스로 거부한 데는 거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개업 노무사인 그의 사무실을 노동자 두 명이 지난해 찾아왔다. 금호타이어 전남 곡성공장에서 타이어 포장일을 하던 그들은 회사가 해당 작업을 외주화한다는 소문에 신분 불안을 호소했다. 알아보니, 하청업체인 ㅅ회사 소속 노동자이면서 해당 공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사실상 불법 파견 상태였다. 같은 작업장에서 다른 네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은 노동을 하면서 하청업체의 관리·감독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임금, 상여금, 교통비, 가족수당, 교대지원금 등은 적게 받았다. 연봉으로 치면 1년에 1500여만원가량 차이가 났다.

이에 이병훈 노무사는 전남지방노동위원회와 광주지방노동청에 이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원청업체인 금호타이어 쪽이 이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진정을 제기했다. 두 기관은 지난 2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청업체는 4월 중순 노동자 두 명을 해고하면서 자진 폐업으로 맞섰다. 그 사이 또 다른 하청업체가 하나 만들어져 이들의 일감을 가져갔다. 이 노무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 노무사는 “노동청과 노동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폐업까지 해가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건 지난해 7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뒤 이번 사건이 전국 최초”라며 “첫 사건이 이렇게 해결되지 않으면 두 번째, 세 번째 사건 때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의무 전환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을 뼈대로 하는 법 개정안이 오는 6월 국회에서 처리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게 노노모 회원들의 생각이다. 이를 막기 위해 노노모 회원들은 국회가 비정규직 보호법을 처리하지 않고 폐기할 때까지 1일 단식과 국회 앞 1인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괴물’

고령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최저임금법의 적용 대상에서 빠지도록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이들이 보기에는 ‘괴물’일 뿐이다. 이 노무사는 “앞으로 더 많은 법률가들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고 모든 사회단체와 함께 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은 돈 안 되는 노동자 사건보다는 기업 쪽 노무 상담과 사건 수임으로 쏠리는 노무사 업계의 현실에도 하고픈 말이 많다. 장혜진 노무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년은 노동법 후퇴의 역사였어요. 지금도 법은 기업에 유리하게 돼 있는데, 기업들이 또 법망을 피해나가도록 노무사들이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 아닌가요? 심지어 현장 노동자들은 일부 노무사들을 ‘노조파괴범’이라고까지 부르더라고요.”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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