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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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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 건물 솟으면 거품 터지더라

호황의 끝물 뒤 경제위기 닥쳐… 올 지구촌 100m 넘는 빌딩 124개 공사 중단
등록 2009-04-17 12:35 수정 2020-05-03 04:25
지난해 준공된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월드파이낸셜센터(오른쪽 두 번째)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총 101층으로 높이가 492m에 이르는 이 건물은 지난해 준공된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REUTERS

지난해 준공된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월드파이낸셜센터(오른쪽 두 번째)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총 101층으로 높이가 492m에 이르는 이 건물은 지난해 준공된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REUTERS

“처음에 온 세상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에 있는 한 평야에 이르러 거기에 정착하게 됐다. 그들은 ‘자,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 하고, 서로 말하며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했다. 그들은 또 ‘자, 성을 건축하고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떨치고 우리가 사방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고 외쳤다.”

성서 창세기 11장에는 무모한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등장한다. ‘바벨탑’이다. 하늘에 가닿기 위해 시작한 인류 최초의 초고층 건물은 끝내 준공되지 못했다. 인간의 오만에 진노한 ‘야훼’가 언어를 뒤섞어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됐고, 결국 탑 쌓던 일을 중단한 채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 ‘하늘로 가는 문’으로 여겼던 바벨의 탑이 곧장 ‘혼돈의 길’로 이어진 게다. 태초부터 초고층 건물에 대한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신화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높은 곳을 향하는 인간의 욕망은 오래도록 변할 줄 모르고 있다.

150층 스파이어타워 두 달째 스톱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초고층 건물 건설공사가 잇따라 멈춰서고 있다. 은 지난 3월23일 미국 시카고발 기사에서 “2012년 완공을 목표로 지난 2007년 야심차게 착공했던 150층(610m) 규모의 ‘스파이어타워’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전면 중단된 채 두 달여째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이 건물은 계획대로 완공되면 미주 대륙 최고층 건물로 기록될 예정이었다.

착공 초기만 해도 온통 ‘장밋빛’이었다. 분양값만 75만달러에서 4천만달러에 이르는 1194개 초호화 주거단지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주인을 찾을 정도로 흥청거렸다. 하지만 지난해 중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시행사인 아일랜드계 개발업체 ‘셸번개발그룹’은 총 10억달러에 이르는 공사대금을 제때 조달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결국 지난해 말 칼라트라바가 미지급 설계비 1134만여 달러에 대한 유치권 설정에 나서는 등 법정 다툼이 잇따르기 시작했고, 지난 1월 이후 공사가 무기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스파이어타워’만이 아니다. 독일의 세계적 건설정보업체 ‘엠포리스’가 올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높이 100m 이상 건물 1431개 가운데 124개가 경제위기로 공사를 중단했다. 미 금융시장 붕괴의 서막을 알린 게 부동산 거품 붕괴임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상황이 좋을 리 없다. 203개 초고층 건물공사 가운데 10.3%에 이르는 21개가 공사를 멈췄다. 아시아 일대에서도 840개 가운데 꼭 10%인 84개 공사가 중단됐단다. 세계 건설 호황을 주도했던 아랍에미리트 역시 된서리를 맞긴 마찬가지다. 은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최근 내놓은 자료 내용을 따 “아랍에미리트에서 중단된 건설공사 규모만도 약 750억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경고의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1999년 1월 독일계 드레스트너은행에 딸린 투자연구소의 앤드루 로런스 소장이 연구보고서를 통해 내놓은 ‘초고층 건물 지수’(Skyscraper Index)란 개념이 그것이다. 로런스 소장은 당시 보고서에서 “경기순환의 정점에서, 경기침체가 시작되기 직전 초고층 건물에 대한 투자가 집중되는 현상이 되풀이돼왔다”고 지적했다. 허황된 욕망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 호황의 정점에서 과도한 투자가 되레 ‘용기 있는 투자’로 치켜세워지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 지구촌 근현대사를 둘러보면 사례는 충분하다. 1907년 10월 미 뉴욕증시가 전년 대비 50%까지 폭락하기 직전에 맨해튼에서 잇따라 착공된 싱어빌딩(47층·187m)과 메트라이프빌딩(50층·213m)은 각각 1908년과 1909년 준공되면서 ‘세계 최고층 빌딩’의 지위를 이어갔다. 대공황의 서막을 알린 1929년 10월의 주가 폭락을 앞두고는 역시 맨해튼에 크라이슬러빌딩(77층·319m)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102층·448m)이 잇따라 착공됐고, 오일쇼크로 미 경제가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들던 1973년엔 맨해튼에 월드트레이드센터(110층·526m)가, 이듬해인 1974년엔 시카고에 시어스타워(108층·442m)가 각각 문을 열었다. 로런스 소장이 제시한 마지막 사례는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와중에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준공된 페트로나스 트윈타워(88층·452m)다. 새로운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다.

2008년 준공된 세계 10대 초고층 건물

2008년 준공된 세계 10대 초고층 건물

대공황·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신호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지구촌 경제는 흥청거리기만 했다. 건설 경기는 장기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로런스 소장의 암울한 경고는 쉬이 잊혀져갔다. 2003년 10월 대만에선 타이베이국제금융센터(101층·509m)가 들어서 세계 최고층 건물 기록을 갈아치웠지만, 거품은 터지지 않았다. 2005년엔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골드코스트에서 세계 최고층 주거 전용 건물인 퀸즈랜드넘버원타워(78층·322m)가 준공됐을 때도 불황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초고층 건물 지수’는 기우에 불과한 듯 보였다. 아니었다. 욕망의 거품은 그예 터지고 말았다. 지난해의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 일리노이공과대학에 딸린 ‘고층 빌딩과 도시 주거환경 연구소’(CTBUH)가 지난 1월26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08년 한 해 동안 준공된 세계 10대 초고층 건물의 평균 높이는 319m에 이른다. 이들 10개 건물의 총 층수만 따져도 676개층이나 된다. 이 가운데 6개가 중국에, 3개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문을 열었다. 나머지 한 곳은 미 필라델피아의 컴캐스트센터(57층·297m)다. 2007년 말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300m가 넘는 건물은 모두 38개였는데, 지난해에만 여기에 4개 건물이 추가됐다. 앞서 한 해 준공된 10대 초고층 건물의 평균 높이가 가장 높았던 때는 아시아가 금융위기의 혼돈에 휩싸였던 지난 1998년이다. 그해 준공된 10대 초고층 건물의 평균 높이는 288m였다.

초고층 건물공사가 잇따라 중단되면서 장기 호황에 취해 있던 지구촌 건설업계는 급작스런 한파에 꽁꽁 얼어붙고 있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이 만들어낸 부동산 거품으로 흥청이던 미 건설업계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미 노동부에 딸린 노동통계국(BLS)이 4월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서브프라임 부실화 사태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지난해 8월 8.2%에 그쳤던 미 건설업계의 실업률은 지난 3월 말 현재 21.1%까지 치솟았다. 이에 따라 만 16살 이상 건설노동자 197만9천여 명이 실업자로 내몰려 있다. ‘바벨의 저주’는 되풀이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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