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쌀은 쌀알이 굵으면서도 투명해요.” “이천은 물도 좋죠. 여기 쌀로 여기서 밥을 해야 맛있습니다.” “어떤 외지 사람이 와서는 밥해놓은 것을 보고 기름 발라놨냐고 해요.” “예전에 어떤 어르신이 이천에 와서야 이게 밥 냄새구나 알게 됐다, 57살이 먹도록 몰랐다 그러더라고요.”
4명의 일일명인이 모여 나란히 밥을 짓고 있다. 맨 오른쪽이 명인으로 뽑힌 이윤옥씨다.
이천 시민이라면 이천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나절 풀 수 있다. 아침 설봉산을 다녀와서 ‘가마솥 이천명 이천원’의 밥을 먹고 있는 아주머니들도 그랬다. ‘가마솥 이천명 이천원’은 2천 명분의 밥을 가마솥에 지어 2천원씩에 파는 것이다. 이천시가 오천시, 칠천시가 아니라 기쁜, 기분 좋은 가격이다. 그 많은 밥을 짓는 가마솥은 세계 최대. 밥이 다 되면 기중기가 뚜껑을 들어올린다. 최미자씨 등 동네산악회 회원들은 밥에 얼갈이와 고추장을 비벼먹으면서 눈앞에서 진행되는 ‘밥짓기 명인’ 선발대회(이천쌀밥 명인전)를 지켜보고 있다. 한복을 곱게 입은 선수 4명이 가마솥을 얹은 부뚜막 앞에서 쌀과 장작을 정돈하고 있다. 밥짓기 명인 선발대회는 이천쌀문화축제의 ‘백미’다. 10월23일부터 시작된 나흘간의 일정에서 하루에 한 명의 일일명인을 뽑고, 10월26일 마지막 날 오후 일일명인 4명 중 최고 명인을 가린다. 오후 3시30분 긴장된 분위기 속에 일일명인 4명이 나란히 섰다. 등에 쪼이는 햇볕은 따뜻하고, 거칠고 부드럽게 바람이 파도를 타는 것이 밥 냄새를 널리 이르게 할 날씨다.
심사위원장은 한국 조리명장 1호인 한춘섭씨. 그는 경기에 앞서 선수들에게 들려주던 심사 원칙을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되지도 질지도 않게, 타지도 설지도 않게 하셔야 합니다. 처음 끓어오르는 물이 제일 맛이 좋습니다. 이 물이 넘치면 감점입니다. 뚜껑을 열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가마솥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불로 모든 과정을 조절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마솥밥은 누룽지가 잘 나와야 합니다. 노랗게 황금빛으로 잘 만들어진 누룽지를 만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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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짓기 초짜에게는 밥물이 넘치는 게 신호다. 뜸 들어가라는. 신호를 받으면 가스레인지로 불을 줄인다. 급한 마음에 뚜껑도 확 연다. 그 뒤에도 밥뚜껑을 수시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익은 정도를 본다. 그런데 선수들은 밥물이 넘쳐도 뚜껑을 열 수 없고, 부뚜막에 붙어 있으니 가마솥을 떼어낼 수도 없다. 가스레인지처럼 ‘1단계, 3단계’ 표시되지도 않는 장작불을 지펴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
다 된 밥을 한춘섭 조리명장(맨 왼쪽) 등 심사위원들이 살펴보고 있다.
명인선발전은 올해로 네 번째를 맞았다. 행사를 준비한 이천시청 농업기술센터 생활자원팀의 김희경씨는 대회 초창기에는 참가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현재 전국 방방곡곡 장작으로 밥을 짓는 부엌은 사라졌다. 부뚜막은 헐리고 가스레인지와 전기압력솥이 자리잡았다. 혹시나 가마솥을 남겨두어도 매일 밥은 전기밥솥 차지다. 첫날 일일명인으로 뽑힌 신둔면의 오연자(66)씨도 그렇다. “감자 삶고 시래기 삶고 메주 쑬 때 쓰지 누가 밥을 해먹나.” 오씨는 마지막으로 가마솥밥을 해본 게 15년 전이라고 한다.
올해 행사 참가자는 42명, 14개 읍·면·동에서 각 3명씩을 내보내고 추첨으로 경기 순서를 짰다. 참가는 남녀노소 누구나 이천 시민이면 가능하지만, 가마솥밥을 지어본 가락이 있어야 하니 참가자들의 연령은 40~60대 여성이다. 마을 단위로 뽑아 내보내니까 마을에서 쌀과 물을 조달한다. 결승전에 두 명이 나온 신둔면에서는 고래논에서 나온 제일 좋은 쌀인 고래실쌀과 석수를 제공했다. 마을이 ‘조직적으로’ 제공하니 신둔면 참가자 두 명의 불쏘시개도 특이하게 똑같이 깻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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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30분 결선대회가 시작되자 참가자들이 밥을 안친다. 불쏘시개로 장작에 불을 붙이고 나면 최고의 화력을 내기 위해 장작을 계속 집어넣는다. 10분쯤 지나자 야외 행사장은 장작 연기로 가득 찬다. 15분쯤 지나자 24일 일일명인 유양자씨의 밥물이 넘치기 시작한다. ‘감점’ 사유다. 물에 빤 행주로 뚜껑을 닦아보지만 넘치는 밥물은 잦아들지 않는다. 유양자씨의 것 외에도 가마솥의 밥물이 한 줄기씩 흐르기 시작한다. 이제 뜸 들이는 시간이다. 온도를 내리기 위해 불을 빼는 동시에 뚜껑을 닦는다. 오연자씨는 코를 솥에 가까이 하고 냄새를 맡아본다. 25일 일일명인 신둔면의 장점희(67)씨는 손을 모으고 밥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듯 눈도 살포시 감는다. 누룽지를 잘 만들려면 뜸 들이는 시간을 잘 맞춰서 다시 불을 붙이고 은근하게 불을 유지해야 한다. 26일 일일명장 이윤옥(49)씨는 30분쯤 지난 무렵 신문지를 태워 불을 지핀다. 40분쯤 지나자 오연자씨가 맨 처음 밥이 다 됐다며 심사위원을 부른다. 뚜껑이 열리고 모락모락 밥 냄새가 난다. 냄새뿐이랴, 냄새는 식감을 자극하고, 밥맛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밥을 푸고 나면 누룽지 차례다. 착 달라붙은 누룽지를 뒤집어 색깔을 보이면 또 한 번 구경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대형 가마솥에서 나온 누룽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손을 뻗고 있다.
밥짓는 마을에 타는 저녁놀
10분 뒤 심사위원장이 4대째 명인을 발표했다. 부발읍의 이윤옥씨 이름이 불렸다. 이윤옥씨는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는 시상식을 할 때 눈물이 찔끔 났다고 한다. “텔레비전에서 시상식 볼 때 다 거짓말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봐요. 눈물 참느라 혼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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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황금빛의 누룽지와 적당한 끈기를 가진 최고의 밥이 탄생했다”며 기뻐했다. 이윤옥씨는 ‘고난’을 딛고 우승을 차지했다. 재료도 급히 조달했다. “오늘 하루 세 번 밥을 지었잖아요(예선, 일일명인 결선, 그리고 명인 결선). 물은 부발읍 직원이 설봉산 약수를 중간에 떠오고 쌀은 장터에서 파는 우리 마을 쌀을 조달해왔어요.” 밥을 하는 중에 고난도 있었다. “누룽지를 만드는데 각목이 모자라는 거예요. 뒤에 있던 신문지를 달라고 해서 두 장 더 태웠어요. 그렇게 해서 쌀, 물, 불 조절의 삼위일체가 됐네요.”
참가자에게 주는 것은 간단한 명인증서가 다다. 이윤옥씨는 “밥하느라 밥을 못 먹어서 배가 너무 고팠”는데 보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얻는 게 많다. 심사위원장은 “결선을 할 때쯤 해가 이슥해지고 밥 연기가 올라오면 고향에 온 것 같고 정말 좋지요”라고 말한다. 절간 스님이 인간이 가장 그리울 때가 마을에 저녁 밥 연기가 올라올 때라고 했던가. 곧 밥짓는 마을에 저녁놀이 늘씬하게 앉았다.
이천=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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