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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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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탄광에 조선인들이 갇혀 있다

등록 2008-08-15 00:00 수정 2020-05-03 04:25

강제징용됐다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이 방치된 현장… 한·일 정부의 무관심 속에 일본 시민단체가 밝혀내

▣ 야마구치·기후·나라·나가노(일본)=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일본 전역에 조선 청년들의 원혼이 배회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강제징용되어 죽어간 원혼들이다. 조국이 외면하고 역사에 기록조차 남지 않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남아 있는 유골을 찾아내기 위해 땀흘리는 건 우리가 아닌 일본인들이다. 일본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드러나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 현장을 지난해부터 올 7월까지 몇 차례 찾아갔다.

일제시대부터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연락선이 도착했던 야마구치현은 조선인 강제징용의 관문이기도 했다. 지금도 부관페리호가 다니는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곳에 우베시가 있다. 이 도시의 해안가에 지금은 폐쇄된 초세이 탄광이 있었다. 이곳엔 조선 청년 134명이 바다물에 수장당한 채 66년 동안이나 방치돼 있다.

공식적 조사·피해보상 전혀 없어

1942년 2월3일 우베 탄전의 해저 광산인 초세이 탄광에서 침수사고가 발생해 183명이 희생됐는데, 이 가운데 134명이 강제징용당한 조선인이었다. 전쟁물자를 대기 위한 살인적 노동이 다반사였던 그때, 이들은 안전에 대한 고려 없는 작업환경 속에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 일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문제는 사고 이후 지금까지 공식적인 조사나 피해보상이 전혀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베 탄전은 침수사고 지점을 그대로 방치한 채 계속 운영되다 67년에 폐쇄됐다. 초세이 탄광 사건은 지금이라도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면 피해 실태 파악은 물론이고 보상까지도 가능한 사안이라고 현지인들은 말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야마구치 현청 당국도 유족들의 주검 인양 요구와 위령비 설립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해마다 사건 당일인 2월3일이면 우베시의 시민단체와 교회, 지역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된 ‘초세이 탄광 침수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주관으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가끔 추모행사에 한국영사관 직원도 참석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본격적인 대일 협상을 외면하고 있다.

우베시의 니시키와 해안에서 초세이 탄광은 쉽게 관찰된다. 해안선에 개설된 2차선 아스콘 도로와 그 아래의 백사장에서 보면, 탄광의 배기구로 사용된 2개의 대형 굴뚝이 수면 위로 솟아나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유족들은 이곳 니시키와 해안을 찾아서 오열만 삼킬 뿐이다.

이처럼 강제징용됐다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이 방치된 현장은 일본 전역에 퍼져 있다. 나고야시의 북쪽에 위치한 기후현. 이곳은 산림이 울창한 지역으로 메이지시대부터 광산개발이 활발했다. 기후현의 북쪽에 위치한 히다시에는 미쯔이 광산 가미오카(神岡) 광업소라는 곳이 있다. 1874년부터 운영된 일본 최대의 납·아연 생산지인 이곳에도 1942~45년 2천 명 이상의 조선 청년들이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아연 제련을 위해 주위에 건설된 댐과 도수로에서도 1천여 명의 조선 청년들이 강제노동에 내몰렸다. 이런 사실은 일본 시민단체인 ‘조선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현지인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조사한 것이다. 특히 네트워크의 기후현 지부 활동가인 시모지마 요시스케는 이곳에서 숨진 조선 청년들의 유골이 아직도 인근 사찰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상 규명 활동을 전개해 강제징용의 실체를 확인해낸 것이다.

지난 2005년 한-일간 합의로 강제징용자 관련 자료에 대한 검토가 시작돼 2006년에 일본 후생성이 1720구의 조선인 유골에 관한 자료를 발표했다. 당시 일본 총무성 자치행정국 국제실은 한반도 출신 민간징용자 유골 자료에 대해 정보공개 요청이 있으면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시모지마는 기후현에 있는 3곳의 시청과 1곳의 군청에 유골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다른 곳은 거절했으나 히다시는 정보를 공개했다. 히다시에 있는 사찰 4군데에 유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뒤 그중 한 곳인 료젠지에 직접 찾아가 조사한 결과, 시모지마는 제주 출신인 김문봉씨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료젠지에서 추모모임도 열렸다. 당시 추모모임을 조직했던 네크워크 기후현 지부의 고바야시 도모코는 “전쟁의 광기에 목숨을 잃어 돌아가신 분들이 이곳 기후현의 작은 사찰에 60년 동안 남아 있었다. 정말 작은 한 걸음이지만, 유골이라도 발견되어 정말 다행이다. 한 맺힌 분들의 유골이 아직도 일본에 남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계속 발굴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현 사찰의 한 맺힌 유골

가미오카 광산에 끌려왔다가 패전 뒤 귀국한 이들 중에는 아직 생존자도 있다. 전북 익산의 김득중(86)씨다. 그는 아직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말도 마세요.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습니다. 구타와 폭력이 너무도 빈번했던 지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광산이나 공장뿐만 아니라 비밀스런 군사시설의 건설에도 조선 청년들은 강제동원됐다. 특히 나라현 덴리시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였던 1941년 12월부터 43년 10월까지 야나기모토 해군비행기지라는 군사시설이 건설됐는데, 이곳에서 노역에 내몰린 조선인 노동자는 3천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야나기모토 비행기지는 건설 당시 길이 1500m, 폭 100m에 달하는 거대한 비행장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기는 보통 800m 활주로면 충분했다고 한다. 일본군에게는 전략적 의미가 컸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전쟁 뒤 미군이 대부분의 활주로를 폭파시켰고 남아 있는 활주로 800m를 2차선 도로로 만들었다. 방공호는 아직도 논 사이에 남아 있다.

주활주로의 서쪽에는 1995년 8월 덴리시청과 덴리시 교육위원회가 공동으로 세운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야나기모토 비행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인부 가운데 ‘강제징용’된 조선인도 있었고 위안소도 마련돼 있었다고 적혀 있다. 비록 지방정부지만 일본의 공식적인 표기에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이런 배경에는 지난 10여 년간 나라현 일대의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 조사를 묵묵히 수행해온 다카노 마사키가 있다. ‘덧없는 덴리 위안소와 야나기모토 비행장’이라는 제목의 조선인 강제징용 보고서를 펴내기도 한 다카노는 올해 59살인 덴리고교 사회과 교사다.

다카노 교사와 ‘나라현 발굴모임’은 이 밖에도 5곳의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가시바시 쓰루미네의 항공군 지하지휘소, 고조시 기타우치의 연료저장용 지하시설, 우타노초의 야마토 수은광산, 노세가와무라의 가나야 광산 다테리 광업소, 미미나시산 터널 등이다.

나가노현 마쓰시로시의 ‘대본영을 보존하는 모임’도 강제징용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마쓰시로 대본영은 전쟁 말기 일왕을 비롯해 일본군과 정부 핵심들이 지하벙커에 숨어 본토에서의 최후 결전을 지휘하기 위한 장소로 건설한 곳으로, 이 공사 또한 강제징용된 조선 청년들이 주로 담당했다. 당시에 죽어간 조선인들을 추모하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모임이 결성됐다.

“희생자가 직접 오는 것은 상당한 압박”

일본에서 강제징용이라는 과거사에 대한 공공기관의 협조는 제한적이다. 총무성의 협조 공문에도 기후현 히다시청처럼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경우는 드물다. 네크워크 사무국장인 우에스기 사토시는 “유족들이나 강제징용 희생자가 직접 일본에 찾아오거나 조사를 하러 오는 것은 일본 정부와 지자체에 상당한 압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추모모임을 비롯한 관련 행사를 자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간의 노력도 압력이 되는데 정부 차원의 조사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강제징용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대본영을 보존하는 모임’의 이타쿠라 히로미 사무국장은 “마쓰시로 대본영은 일본 군국주의의의 상징이자 조선인 강제동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곳의 실체를 더욱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과거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 정부의 무관심도 상당한 영향이 있다. 군국주의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였던 현장의 강제징용 역사조차 기록하지 않는다면 다른 현장은 더욱 무관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3월이면 그나마 정부 차원에서 활동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도 종료된다. 강제징용이라는 과거사를 정부 차원에서는 영원히 외면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유족들과 일본의 민간인들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본영을 보존하는 모임’의 활동

“한국 정부 조사에 적극 협력할 것”

일제에 강제징용돼 일하다 죽어간 조선 청년들의 원혼을 달래고 피해의 진상을 조사·발굴하는 모임은 일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돼 있다.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 종교계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해당 지역에서 교직에 종사하는 역사교사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진정한 반성과 참회 속에 새로운 한-일 관계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임은 일본열도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남쪽 끝인 오키나와 이남의 아에야마제도까지 광범위하다.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곳만도 30여 개에 이른다. 이들은 매년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여는 것은 물론 강제징용 현장을 보존하고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사업에도 열성적이다.
이 중 대표적인 곳이 나가노현 마쓰시로시의 ‘대본영을 보존하는 모임’이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국주의가 최후의 결전장으로 건설했던 대본영에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강제징용됐던 사실을 조사하고 있다. 모임을 주도하는 이타쿠라 히로미는 “한국 정부가 조사에 나서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한-일 관계를 바로 세우는 기초가 될 것이다. 비록 일본 정부는 과거의 역사를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은 물론 또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빠져들고 있지만 지역의 시민들은 그런 잘못된 일본 정부에 끌려가지 않는다. 일본 시민들과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마쓰시로 대본영의 역사적 의미와 실체를 알리는 일에는 마쓰시로 고교 향토사연구반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 고교 동아리 활동에서 비롯된 향토사 연구가 과거 군국주의의 대표적 현장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노력으로 확대됐다. 지금도 향토사연구반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마쓰시로 대본영 인근 동네 한가운데에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곳을 평화기념관으로 만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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