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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재산 환수, 법원에서 길 잃다

등록 2008-07-11 00:00 수정 2020-05-03 04:25

특별법 시행 뒤 땅 매입한 제3자 소송에서 엇갈린 판결… 대법원 판결까지 환수 작업 차질 불가피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갑갑하네요. 이렇게 엇갈린 판결이 나왔으니…. 일단 상급법원 판단을 받아봐야겠고, 이제 어떻게 일을 해나가야 할지도 생각해봐야 하겠고….”

지난 7월4일 오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이하 재산조사위) 장완익 사무처장이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오전 친일 재산 환수와 관련한 소송에서 재산조사위가 패소해, 친일 재산 환수 작업에 큰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기 때문이다. 불과 사흘 전에는 다른 재판부에서 똑같은 성격의 사안을 놓고 정반대 판결을 내린 바 있어, 혼란은 더욱 커 보였다. 그렇다면 법원이 재산조사위 활동에 제동을 건 이유는 무엇일까? 또 재판부별로 정반대 판단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애매모호한 법조문이 원인

일단 판결 내용을 살펴보자. 서울행정법원 제3부(재판장 김종필)는 지난 7월4일 친일파 고희경의 후손에게서 친일 재산인 경기 연천군 백학면 땅 6576㎡를 매입한 한 종중이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낸 국가귀속결정 취소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쟁점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친일 재산인 줄 모르고 땅을 산 제3자가 이 땅에 대한 권리를 보호받아야 하는지 여부였다. 제3자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땅은 국가에 귀속되고 제3자는 땅을 판 친일파 후손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거나 매매대금 반환 청구소송을 내 돈을 되찾아야 한다. 반대로 제3자의 권리가 인정된다면, 재산조사위는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해 친일파 후손들을 상대로 똑같은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법 조항에서 보호하는 제3자의 범위와 관련해) 선의 여부, 정당한 대가의 지급 여부 등에 따라 제한하고 있을 뿐 ‘재산의 취득 시기’에 따라 범위를 정하지 않고 있다”며 제3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반면, 의정부지법 행정1부(재판장 최영룡)는 지난 7월1일 친일파 민병석의 후손에게서 경기 고양시 땅 956㎡를 매입한 곽아무개(50)씨가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낸 국가귀속결정 취소청구 소송에서 “특별법에 보호받는 대상으로 명시된 제3자의 범위에 ‘특별법 시행 뒤 친일 재산에 대하여 권리관계를 형성한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한쪽 재판부는 “선의의 제3자의 법익을 침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또 다른 재판부는 “법 제정 취지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물론, 양심적 병역 거부를 놓고도 유·무죄로 결론이 엇갈리듯이, 하급심에서도 재판부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판결이 갈린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애매모호한 법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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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12월29일 시행된 특별법에서는 “친일 재산은 그 취득·증여 등 원인 행위시에 이를 국가의 소유로 한다. 그러나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하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3조 1항)고 규정하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는 제3자의 요건으로 ‘선의’와 ‘정당한 대가’만 언급했을 뿐, 특별법 시행 전 취득한 제3자만 보호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재산조사위는 법 취지에 따라 여기에서의 제3자는 특별법 시행 이전에 땅을 매입한 제3자에 한정되는 것으로 해석해 일을 진행해왔지만, 법 시행 뒤 땅을 매입한 제3자 10여 명은 자신들도 특별법에서 명시한 보호 대상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재판부별로 갈린 것이다.

이렇게 ‘논란’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애매모호한 법조문과 관련해 당시 법안 제정 과정을 지켜본 한 인사는 “사실 이 법안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당시 국회 법사위에서는 법률 적용 대상을 최대한 좁히려는 쪽과 그대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고, 타협해나가는 과정에서 법조문의 상당 부분이 수정됐다”고 말했다. 반면 한 재산조사위 관계자는 “참고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만들어낸 법안임을 생각해보면 (법조문이 허술한 것이) 그렇게 무리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일이 이렇게 꼬였다면, 이제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물론 이는 전적으로 법원의 손에 달려 있다.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10여 건의 ‘제3자 관련 사건’(표 참조)이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재산조사위 패소로 끝난다면, 재산조사위는 친일파 후손들을 상대로 지루한 소송을 벌여 매각대금을 환수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재산 조사도 힘든데 소송까지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시간이다. 4년 한시조직으로 만들어진 재산조사위는 벌써 활동 3년째를 맞고 있다. 그런데 제3자 사건들이 대법원 판단을 받기까지는 앞으로 길게는 1년 이상이 소요될 전망이다. 그 사이 특별법 시행 뒤 땅을 매입한 제3자 소유의 땅들에 대한 조사와 국가 귀속 결정은 강한 저항에 부딪혀 재산조사위 활동 자체가 심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또 만약 대법원에서 재산조사위가 패소할 경우엔 친일파 후손을 상대로 한 소송을 진행하느라, 친일 재산 조사 활동에 투입해야 할 역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별법을 개정하거나 재산조사위 활동을 연장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쪽의 그간 태도를 종합해보면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국회의 ‘허술함’과 법원의 ‘법대로’에 치여, 해방 60년 만에 민족 정기를 세우자며 시작한 친일 매국노 재산 환수 작업의 앞날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 형국이다. 물론 그 사이 친일파 후손들은 땅을 제3자에게 팔아치우며 빙그레 웃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악의의 제3자’ 논란

친일파 재산, 정말 모르고 샀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를 상대로 소송을 낸 제3자들은 한결같이 “친일 재산인 줄 모르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은 ‘선의의 제3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재산조사위는 소송을 낸 제3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악의의 제3자’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친일파 송병준 후손 송돈호(63)씨에게 1억9천만원을 주고 강원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땅 2871㎡(868평)를 매입했다는 김아무개(48)씨의 사례이다. 우선 이 거래를 실제 진행한 이는 김씨의 남편 이아무개(55)씨인데, 이씨는 철원 일대에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는 ㅊ사와 ㅅ사의 대표이사이다. 여기에 땅을 판 송씨는 친일파 조상 땅찾기 소송의 주역으로, 수십만 평 규모의 인천 부평 미군기지 땅 사기 혐의로 구속되는 등 부동산 업계에서 나름 유명 인사이다.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전문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송씨와 거래하면서 국가 귀속 대상이 될 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재산조사위의 판단이다.
송씨와 김씨가 작성한 토지거래계약서 또한 의심을 부채질한다. 계약서에는 매매 대상으로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9-1번지 외 7필지’라고만 기재돼 있을 뿐이고 매수인 역시 ‘이○○ 외 1명’이라고만 적혀 있다. 거액이 오가는 부동산 계약서에서 정확한 지번과 땅의 면적, 매도·매수인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재산조사위는 이밖에 △송병준 후손 11명의 공동명의였던 이 땅을 송돈호씨 한 사람에게서 매입하면서 다른 공유자들로부터 계약을 위임받았다는 증빙 자료도 없이 계약을 체결한 점 △특별법 발효 8일 전에 계약을 맺고 특별법 발효 당일 잔금을 치르기로 ‘급하게’ 계약을 체결하고 등기를 신청한 점 등을 들어 “매매계약서가 급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땅을 산 쪽은 이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이씨는 지난 6월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 사람 땅으로 돼 있으니까 (친일파 땅인 줄 모르고) 산 것인데 무슨 소리냐. 조상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것을 알면 계약을 했겠냐”며 “언론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법정에서 할 말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진실은 당사자밖에 모르지만, 역시 판단은 법원의 몫이다. 서울행정법원 제11부가 심리한 이 사건은 7월23일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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