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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여, 이제 푹 쉬시라

등록 2008-06-06 00:00 수정 2020-05-03 04:25

문헌사료 고증 결과에 따라 원래 자리 찾아, 석촌동 주택가에서 롯데월드 코앞으로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370여 년 전 벌어졌던 ‘삼전도의 굴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가. 1637년 1월 조선 인조 임금이 청나라 황제 앞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했던 사적을 새긴 삼전도비(사적 101호)가 50여 년 만에 원래 터 근처로 옮겨간다. 터로 지목된 곳은 서울 잠실 석촌호수 서호의 북동쪽 녹지공원. 국내 굴지의 놀이시설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의 코앞이다.

전례 없는 문화재위원회의 이전 결정

비석을 관리해온 서울 송파구청은 최근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내년 상반기에 삼전도비를 현재 자리인 석촌동 289-3번지 주택가에서 석촌호수 부근으로 옮기는 이전 공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문화재위원회(위원장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4월 초 사적분과 위원들의 현장 답사를 거쳐 4월18일 전체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의 삼전도비 이전안을 통과시킨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사적분과 위원장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구청이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에 맡긴 고증 연구용역 결과를 검토한 결과 이전의 전제조건인 비석의 원래 위치를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밝혀냈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사적분과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호숫가 위쪽 녹지 언덕에 비석을 옮겨 세울 것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문화재위원회가 국가 사적을 통째로 옮기도록 허용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전 지역으로 사적이 옮겨가도 주위의 건축 행위 제약 등을 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예외조건까지 달았다. 이전할 비석에 보호각을 세울 것인지는 문화재청과 구청 쪽이 협의 중이지만, 구청 쪽은 이미 4월 서울시에 비각 설치 및 설계 관련 예산 2억2천여만원을 책정해 올린 상태다. 구청의 문화재관리팀 쪽은 “내년 봄까지 석촌호숫가 주위에 비각 설치, 주위 정비 등에 따른 작업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석의 이전은 송파구청에서 2003년부터 계속 문화재청 심의를 요청해온 현안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역사적 연고가 전혀 없는 곳에 비석이 들어서, 재개발 차질 등 주민 재산권에 피해를 미치고 있다는 민원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문화재위원회는 원위치에 대한 정밀한 고증이 없는 한 이전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지켜왔지만, 구청 쪽이 원위치에 대한 고증자료를 제출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용역 책임자였던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지난 2월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비석의 정확한 원래 자리는 현 롯데월드 바로 밑 석촌호수 서호의 북동쪽 부분(매직 아일랜드 옆 수면)이라고 고증하고, 오차는 반경 10m 정도로 추정했다. 조선 중기부터 일제 말기까지 문헌사료에 나오는 삼전도비의 위치를 지도에 표기한 뒤 위치의 비율을 갖고 현대 지도에 표시하거나,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현지 지번도를 교차 비교한 결과다. 따라서 호수를 메우지 않는 한 원래 자리 이전은 불가능하다. 석촌호수 쪽이 원래 한강의 본류였다가 70년대의 개발로 물길이 끊기면서 하상 변화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주민 민원에 따라 사적이 이전하게 돼

옮긴 자리가 이용객이 많은 놀이시설 부근이어서 안전관리가 쉽지 않다는 난점도 있다. 용역을 맡은 배우성 교수 등 상당수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고궁박물관 이전을 지목하기도 했지만 수용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주민 민원에 따라 사적이 이전하는 부정적 선례를 만들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삼전도비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무너뜨려지고, 파묻히고, 래커칠로 낙서가 되는 등 수난이 끊일 새 없었다. 원래 터 근처에 옮겨진 비석이 과연 안식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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