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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스핑크 ] 50년을 석굴에 파묻혀 살다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정말 왕릉 밑에 묻히고 싶더라고요. 경주 무덤들은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옛 신라왕들의 묵직한 권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손을 다소 떠는 푸른 눈의 노학자는 감개무량한 듯 운을 뗐다. 왕릉 주변을 거닐면서 “곧 사라질 나의 미래, 죽음을 떠올렸다”는 그는 월터 스핑크(80) 미국 미시간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다. 한국 석굴암을 비롯해 중국·일본 불교미술의 뿌리가 되는 인도 아잔타 석굴 등을 50여 년간 연구해온 권위자다. 청추예술사학회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이 5월24일 서울대 박물관에서 연 그의 팔순 기념 국제학술행사에 참석한 뒤 25~26일 고도 경주를 둘러보고 온 참이었다. 앞서 그는 기념행사에서 아잔타 석굴의 건축양식 등에 대해 열강을 펼쳤다.

“석굴암? 인상적이었지요. 당연히 인도의 굽타풍 석굴조각과도 인연이 있을 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정 불상을 누가 어떤 의미로 만들었는지 사회적 맥락을 찾아야 한다는 점일 겁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를 자꾸 비교하기에 왜 그럴까 싶었는데, 이제 이유를 알게 됐다”는 말도 했다. 일본의 신사, 불교 관련 유물들은 깊은 느낌이 있는데, 한국 미술은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소감도 곁들였다. 유리벽으로 막은 석굴암 보존 상황에 대해 “관객 규모나 인공 석굴의 특징상 이해되지만, 불상 가까이 들어가는 예외적 경우에 대해 관객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원칙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도 했다.

그의 평생 화두인 아잔타 석굴사원은 5세기 중엽 인도 불교의 르네상스를 이끈 바타카나 왕조의 하리세나왕이 암벽 25군데에 조성했다. ‘집금강보살’과 ‘무녀도’ 등 장엄한 색채와 현란한 선이 숨쉬는 벽화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스핑크는 50년대 중반부터 석굴에 파묻혀 ‘퍼즐 찾듯’ 석굴 건축의 비밀을 캐왔다고 했다. 실제로 석굴의 조성 시기와 구조 양식 등에 관한 그의 학설은 현재 세계 학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설로 인정받는다.

“아잔타 석굴의 경우 보존과 감상의 원칙을 조화시키느라 고심 중입니다. 세계 각지의 관객에게 석굴의 진수를 보여줘야겠지만, 이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나 혹 있을 문화재 테러에 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관객의 몰림 현상을 막기 위해 관람 일정을 1박2일로 나누고, 일부 벽화는 떨어진 곳에 모조품 감상으로 대체하는 방안 등도 주정부와 협의 중입니다.”

툭하면 콘크리트를 발라 석굴을 정비하려는 현지 당국을 만류하기 바쁘다는 그가 웃으면서 한마디 던졌다. “전생에 석굴을 만든 하리세나왕이었던 것 같아요. 수십 년간 석굴에서 처박혀 연구하는 고독을 정말 즐겼지요. 나중에 저를 화장한 재도 여기에 뿌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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