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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에게 바친 ‘서명용 펜’

등록 2008-05-30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총리 순방길에 외교관행 깨고 상대국 펜까지 사들고 간 공공기관 “이런 게 관행”</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 5월11∼19일 한승수 국무총리의 중앙아시아 4개국 자원외교 순방길에 한국석유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자원 관련 공공기관 대표들이 대거 동행했다. 이 가운데 한 기관이 작성한 총리 중앙아시아 순방 관련 출장계획 문건을 보면 ‘출장비용’ 항목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서명펜 구입을 포함한 협력비 명목으로 각 국가마다 1천달러의 비용을 지출’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외교부 조약과도 두 자루로 돌려쓰는데…

통상 서명용 펜을 포함한 서명식 준비는 접수국(외교 사절을 받아들이는 국가)이 모두 맡는 게 외교 관행이다. 그렇다면 석유공사는 왜 서명용 펜을 직접 구입한 것일까? 석유공사 쪽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석유공사와 우즈베키스탄국영회사 간에 두 건의 자원협정 서명식이 있었다. 이를 위해 서명용 펜 몇 자루를 우리가 준비해갔다”며 “비싼 만년필을 쓰지 않고 한 자루당 10만원대의 펜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또 석유공사 쪽은 “자원부국인 저쪽은 갑의 입장이고, 우리는 자원개발을 위해 갔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서명펜은 한국 쪽이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사용한 펜은 거기에 선물로 줬다. 대체로 한 번 사용한 서명펜은 다시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 쪽 대표가 서명할 때 사용한 펜도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다. 외교부 의전행사팀 관계자는 “카자흐스탄에서 있었던 광구 지분 양수도 본계약의 경우 총리는 서명식 뒤에서 임석만 했고 서명 주체는 석유공사 대표 등 공공기관장들이었다. 총리가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총리 순방은 외교통상부가 전체 일정을 짜고 의전 분야를 맡았다. 외교부 조약과에는 한 자루 값이 100만원에 육박하는 독일산 몽블랑 만년필 두 자루가 항상 보관돼 있다. 정부 간의 조약 서명에 사용하는 서명용 펜이다. 서명식에서 쓰고 나면 회수해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사용한다. 서명용 펜이 두 자루인 건 두 국가가 맺는 조약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자간 협정 서명식에는 대체로 각국이 서명펜을 직접 준비해오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외교부 조약과 관계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서명용 펜은 공식 조약 서명에만 쓴다. 값비싼 만년필인데, 예전에 쓰는 사람이 눌러 쓰거나 해서 펜촉이 벌어져 서명 도중에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뒤부터 다른 서명식에는 사용하지 않고 조약 체결에만 쓰고 있다”고 말했다.

서명펜으로는 몽블랑, 파카, 워터맨 등 수십만∼수백만원짜리 값비싼 만년필이 주로 쓰인다. 만년필 업계 관계자는 “서명용 만년필이 따로 제작되는 건 아니지만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튁 모델처럼 펜촉 굵기에 따라 서명용으로 자주 쓰이는 제품군이 있다”며 “펜촉이 굵고 잡았을 때 묵직한 느낌을 주면서 신뢰감을 주는 펜이 주로 쓰인다. 정부나 대기업에서 서명용 펜을 특별 제작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국내에서 총리가 어떤 세리머니에 참석해 서명할 때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만년필을 사용할 때도 있지만, 행사를 주관하는 부처에서 따로 서명펜을 준비하는 일도 가끔 있다”고 말했다. 단 한 번의 총리 서명을 위해 정부 예산에서 값비싼 서명용 펜을 그때그때 구입해 쓴 뒤 서명식 관계자들에게 선물로 남겨주는 것일까?

IMF 졸업장엔 국산 펜, 노무현은 모나미

1997년 12월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할 때 쓴 만년필은 별도로 구입한 수십만원짜리 몽블랑 펜이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IMF 구제금융은 외자도입법에 의해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지 국가 간 조약이 아니라서 외교부가 갖고 있던 서명펜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반면 2001년 8월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IMF 졸업장(구제금융 최종상환증서)에 서명할 때 쓴 서명펜은 국산 아피스 만년필이었다. 한국은행 김학렬 국장은 “당시 총재가 ‘역사적인 서명식이니 국산 펜으로 서명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서류에 결재할 때 300원짜리 모나미 플러스펜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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