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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은 서비스업 종사자 같았다”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춤추고 안내하고 옷 다리고 차 끓이고…국방부·합참에서 군복무했던 독자의 ‘여군 수난기’와 국방부 반론</font>

<font color="#216B9C">‘여군 성폭력 백서’(707호 표지이야기)를 읽은 독자가 군복무 시절에 경험한 ‘여군 수난기’를 보내왔다. 이에 대한 군 당국의 설명도 들어봤다.</font>

“뭔가를 보고 들었어도, 못 보고 못 들을 것으로 해야 돼. 그게 속 편한 거야.”

한 군대 고참은 그렇게 말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실미도’ 같은 어느 비밀부대 이야기가 아니다. 늘 그림자처럼 장성을 따라다니며 발이 되어주는 운전병들의 이야기다.

원로 장성 만찬의 댄서?

나는 국방부 근무지원단 수송대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했다. 검정색 승용차를 타는 누군가의 ‘전속 운전기사’가 되어 움직이는 운전병들에게는 보고 들은 이야기도 많다. 택시기사가 승객이 탈 때마다 시사·경제 논평을 한 움큼씩 쏟아내듯이, 운전병들은 쉴 새 없이 군 관련 목격담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말조심하라’는 고참의 말꼬리도 늘 쫓아다녔다.

하지만 이제 예비군 4년차에 고참의 충고를 ‘과감히’ 흘리고 군복무 시절인 2003~2004년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운전병으로서 여기저기에서 보고 느낀 ‘여군 수난기’다. 국방부·합동참모본부가 있는 군 최고기관에 근무한 덕에 여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오거리에서 단국대를 지나 남산 1호터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금빛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인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외교통상부 장관 공관’. 표지판 옆에는 체격 좋은 헌병들이 출입구를 지키고 서있다. 이른바 ‘공관 밀집 지역’이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이 비밀스런 장소에는 여섯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 국방부장관·합동참모본부의장·육군참모총장·한미연합사 부사령관·해병대사령관·외교통상부 장관이 그들이다.

2003년 늦가을로 기억되는 어느날 밤,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는 원로 장성들을 초청한 저녁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한남동 공관은 널찍한 잔디마당을 중심으로 본채와 공관병 숙소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대기하기 위해 공관병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찍이 보이는 공관 본채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공관병 숙소라 해봤자 작은 부엌에 방 2개가 딸려 있는 단출한 건물이었다. 평소 서너 명의 공관병이 기거하는 곳이다. ‘집주인’인 공관병들은 행사 때문인지 턱시도를 단정히 차려입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주인이 이렇게 바쁜 사이, 비좁은 방은 ‘손님’들 차지였다. 각지에서 올라온 운전병들 10여명이 주문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20명 가까이 되는 군악대원들이 빽빽이 들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다닥다닥 붙어앉은 채 졸린 눈을 비비며 작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양악기·전통악기를 다루는 이들은 육군참모총장 저녁식사에서 음악을 연주하러 온 이들이었다.

짧은 머리의 군악대원 사이로 단발머리를 한 채 색동 한복 저고리를 입은 여성도 있었다. 짙은 화장에 전통무용 복장을 한 그는 군악대 소속 여군 부사관. 행사에서 춤을 추기 위해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긴 대기 시간이 지나자 공관병 숙소에 전화벨이 울렸다. “군악대원들을 들여보내라”는 전화였다. 군악대는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일어섰다.

다음은 행사용 문지기 역할을 하는 여군에 대한 추억. 이들을 목격한 곳은 ‘무궁화회의’ 행사 현장에서였다. 무궁화회의는 합참이 주최하는, 매년 장성들이 모여 군사 현안을 토론하는 행사다. 2003~2004년에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이 행사가 열렸다.

2004년 초여름 무궁화회의 참석을 위해 찾아간 육군사관학교에는 학교 입구에서부터 흰 정복을 차려입은 여군 헌병대 부사관들이 수신호로 장군들이 탄 차량을 안내하고 있었다. 날씬하고 큰 키에 흰 장갑을 낀 여군 부사관들의 손길을 따라 도착한 건물 앞에는 또 다른 여군 헌병대 부사관이 서 있었다. 이들은 도착하는 차량 문을 열어주고 인사를 했다.

비단 이날만이 아니다. ‘별’들이 여럿 뜨는 대형 행사 때는 언제나 행사장 곳곳에서 여군 부사관들을 볼 수 있었다. 전직 국방부 장관 초청 저녁식사가 열리는 국방부 영내 국방회관에서도 여군 부사관들이 나와서 승용차 문을 열어줬다. 아무래도 남성 군인의 절도미보다는 여군의 서비스 경쟁력에 주목한 정책인 것 같았다.

행사장 뿐 아니라 일반 사무실에서도 여군에 대한 특별한 대우(!)가 엿보였다. 국방부와 합참의 본부장급(중장급) 사무실에서는 여군 부사관이 장군들의 옷을 다리고, 차를 끓이고, 전화를 받았다. 말그대로 여비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영관급 보좌관이 별도로 있지만 업무는 ‘여비서’ 영역과는 많이 다르다. 한 사무실에서는 이런 ‘여비서’ 역할에 회의를 느낀 여군 부사관이 “야전부대 소대장으로 근무지를 변경하겠다”며 근무지 변경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굳이 여군만이 도맡아야 할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장 이하 장성들과 영관급 장교들의 사무실에는 같은 여성이더라도 나이 많은 군무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차이를 느끼게 했다. 여군은 마치 서비스 직종 종사자인 것처럼 보였다.

여비서 정도의 대접

여군들과 관련된 ‘잡음’이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영내 국방회관에서 군 간부들의 저녁식사나 술자리에 여군 부사관들이 불려나와 술을 따른다는 등의 말들이었다. 운전병들 사이에 돈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이었지만, 동등한 구성원이라기보다는 부속물 구실을 하는 당시 여군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자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렇듯 ‘말 못할 운전병’이 본 기억 속에서 여군들은 특수한 위치에 서 있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흐름이 지배적인 군대라는 구조 안에서 ‘여비서’ 정도의 대접을 받는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국방부와 합참에서 겪은 여군의 모습으로, 전체 여군의 현실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동안 시간이 흘렀고, 나아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군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군대 안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처럼, 아직도 상당수 여군들은 약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font color="#216B9C">이 글과 관련해 육군본부는 “2003년 12월15일 역대 참모총장들이 참석한 정책자문회의와 만찬이 열렸으며, 당시 행사 자료를 보면 이 자리에서 국방부 군악대 등이 와 등을 연주했지만 여군이 나와서 춤을 췄다는 기록은 없다”고 밝혀왔다. 국방부는 “당시 국방부 군악대에 여군 부사관이 근무하고 있었으나, 행사 참석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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