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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스토킹 사건의 진실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여군 군악대장은 항명 혐의로 형사처벌, 스토킹 확인된 남성 직속상관은 경고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피고인 박○○ 대위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다.”

지난 4월1일 오후 강원 화천군 ××사단 군사법정. 한 여군 대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혐의는 직속상관에 대한 항명. 하지만 피고인은 “상관이 노골적으로 성적 스토킹을 해왔고, 이에 응하지 않자 자신을 음해한 것”이라며 곧바로 항소했다. 이는 최근 몇 달 동안 남성 상관의 성적 스토킹과 여군 부하의 항명 여부를 두고 군 내부에서 논란이 됐던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의 1차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판결 뒤 사건의 진실과 군 당국의 조처가 정당했는지를 둘러싼 의혹이 커지고 있다.

차 안에서 ‘남자친구와 자봤냐’ 질문

사건은 ××사단 군악대장인 박아무개(27·여) 대위가 지난해 9월20일께 헌병대로부터 소환장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박 대위의 품위유지 위반, 직권남용 등 혐의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진행됐다. 병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놈” “개××” 등의 욕설을 한 혐의, 부대 번개통신(비상 연락 점검)에 불응한 혐의, 부하 병사들과 회식 뒤 폭탄주 5잔을 마신 혐의 등 자질구레한 수십 가지 혐의들에 대한 추궁이 이어졌다. 군악대 병사들의 알몸을 보기 위해 샤워장에 접근하고, 군악대원들로 하여금 팬티만 입은 채 바나나보트를 타게 했다는 성추행 혐의도 포함됐다.

헌병대는 약 3주 뒤 사건을 사단 법무참모부에 송치했다. 욕설과 400m 거리 음주운전, 지각 귀대 사실 등이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팬티만 입은 채 바나나보트를 타도록 해 병사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회의 뒤 직속상관인 본부근무대장에게 경례 없이 사무실을 나간 혐의도 적시됐다. 하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후 기소 내용에서 빠지게 된다. 박 대위를 도와온 친구 ㅂ씨는 “성추행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 일부 혐의가 사실일지언정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범죄자로 몰린 박 대위는 지난해 10월 말 한 통의 진정서를 냈다. 직속상관인 본부근무대장 송아무개(37) 소령이 성적 스토킹을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부대 전입 직후인 지난해 2월부터 “남자친구와 자봤냐” 등 성적 질문을 일삼더니, 3월에는 ‘2007년에는 남자친구를 사귀지 말 것’ ‘모든 지출 내역을 보고할 것’ ‘22시 이전에는 복귀할 것’ ‘외출시 목적지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할 것’ 등이 적힌 각서에 서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50여 통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보낸 일도 언급됐다.

헌병대 조사를 받은 박 대위가 갑자기 송 소령의 스토킹 사실을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헌병대 조사의 배후에는 송 소령이 있었다. 박 대위의 친구 ㅂ씨는 “송 소령은 헌병대 소환 통보를 받은 박 대위에게 ‘군악대 병사들이 제보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된 수사 서류에는 박 대위를 수사 의뢰한 사람이 바로 송 소령으로 기재돼 있었다”고 말했다. 헌병대가 박 대위에게 추궁한 자질구레한 비위 혐의도 송 소령이 수개월 동안 꼼꼼히 작성해온 ‘초급장교 관리 및 관찰 결과’ 기록에 바탕한 것들이었다.

송 소령이 제보하고 헌병대가 조사한 박 대위의 비위 사실과, 박 대위가 제기한 송 소령의 성적 스토킹 사실을 동시에 인지한 사단에서는 강도 높은 조사에 착수했다. 법무참모부는 지난해 12월 중순 박 대위가 진정한 내용에 대해 무혐의 처분이라는 결과를 먼저 내놨다. 남자친구를 사귀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각서를 작성하도록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직속상관으로서 평소 진정인의 부대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관리하던 중 진정인의 바른 생활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송 소령은 형사처벌을 면한 대신 경고장을 받았다. 스토킹 사실 자체는 인정됐기 때문이다.

“성희롱 기타 평등권 침해의 차별 행위를 해서는 아니됨에도 불구하고 2007년 2월 하순경 군악대장 박○○ 대위의 휴대전화에 사랑한다는 취지의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3월26일경 휴가 중이던 박○○ 대위로 하여금 같이 있는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로 전송시키게 하고, 3월 하순경 일과 시간 종료 뒤 피해자 박○○ 대위와 단둘이 차량에 탑승하여 ‘남자친구와 자봤냐’는 질문을 하는 등 부적절한 성적 언동으로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하였으므로 이를 엄중 문책해야 할 것이나, 그동안 근무 공적과 본 건에 대한 반성 정도를 참작하여 이번에 한하여 엄중 경고하니 차후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인 ‘경고’로 송 소령의 스토킹 사건을 마무리한 군 당국은, 박 대위에게는 기소라는 강수를 뒀다. 기소 내용은 △‘(그럴 거면) 타 부대로 전출 가라’는 송 소령의 발언에 ‘본인은 국방부 장관이 임명한 장교인데, 영관급 지휘관인 대장님이 전출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해 안 된다’며 항의한 혐의(상관 면전모욕) △두 차례에 걸쳐 군악대 병사들에게 가혹행위를 한 혐의(직권남용) △네 차례에 걸쳐 “군악대장실에서 근무하라”는 등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혐의(항명) 등 세 가지였다.

지난 3월18일 오후 열린 재판에서 박 대위는 혐의를 부인하고 사건의 발단에 송 소령의 스토킹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송 소령이 지난해 2월과 3월 박 대위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횟수가 각각 149건과 431건에 달하고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100건 이상의 통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통화 내역 조회 결과도 증거물로 제출했다.

피우진 “여군에게만 엄정한 잣대”

반면 군검찰은 송 소령을 증인으로 내세워 박 대위의 항명 사실을 강조했다. 송 소령의 직속부하인 본부대 행정장교 김아무개 중위도 송 소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송 소령은 ‘사랑한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에 대해 “부대의 경례구호가 ‘○○○, 사랑합니다’여서 상관으로서 부하에게 격려하는 의미를 담아 보낸 것들”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또 되레 자신이 차별을 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재판은 다음날 새벽 1시가 넘어서 끝났고, 박 대위에게는 징역 1년6개월이 구형됐다. 재판부는 결국 4월1일 기소 내용 가운데 지난해 9월27~28일 두 차례에 걸쳐 “군악대장실에서 근무하라” 등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혐의만을 유죄로 인정하고 나머지 혐의에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나마 박 대위의 항명 여부도 논란 거리를 남기고 있다. 각자의 진술이 어긋나고, 항소심에서 다시 다퉈질 사안이기 때문이다. 또 유일하게 유죄로 인정된 항명 혐의는 헌병대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스토킹과 그에 이은 헌병대 조사만 없었다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라는 1심 형량이 이후 확정되면 박 대위는 강제 전역될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규정으로 강제 전역된 뒤 군대 안 여성 차별 문제 등을 고발해온 피우진 전 중령은 이 사건을 접한 뒤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수인 여군에게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다수인 남성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온 것이 군대의 역사이긴 하지만, 아직도 군대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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