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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뜨리려고 기쓰는 시험

등록 2008-01-04 00:00 수정 2020-05-03 04:25

재추위 결성된 주공 주관의 주택관리사보 시험… 2006년 21.5%였던 1차 합격자가 2007년 5.1%에 불과해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박형근(42)씨는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10월21일 10회 주택관리사보 시험을 봤고, 11월30일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대한주택공사(주공)를 상대로 한 박씨의 투쟁은 해를 넘어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주택관리사보 시험을 주관하는 곳은 주공이다.

발표 하루 전 “7문항 문제 있다”

이전까지 박씨는 아파트 전기실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주택관리사보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년 반 전부터다. 그는 “한 달에 150만원 정도 받는 돈으로는 여섯 식구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24시간 맞교대가 이어지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시간을 쪼개 학원을 다니고, 문제집을 풀고, 시험을 봤다. 주택관리사보 시험에 붙으면 3~5년 정도 경험을 쌓은 뒤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생활이 좀 나아질 거란 기대를 한 거죠.” 박씨는 쓰게 웃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박씨는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시험 범위에도 없는 이상한 문제들이 출제됐기 때문이다. 1·2차 시험을 합쳐 출제된 문제 200개 가운데 35%에 이르는 70개 문제에 대해 이의신청이 제기됐다. 주공은 이 가운데 7개 문제에 대한 이의를 받아들여 모두정답·정답없음·복수정답 등의 결론을 내렸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딱 하루 전이었다.

이의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수험생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1차 합격률이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총 응시자 1만7145명 가운데 1차를 통과한 사람은 880명(5.1%)에 불과했고 그중 340명이 2차 시험까지 붙어 최종 합격했다.

주택관리사보 시험은 하루에 1·2차 시험을 동시에 본다. 1차는 민법총칙·회계원리·공동주택시설개론 세 과목이고, 2차는 주택관리관계법규·공동주택관리실무 두 과목이다. 이 가운데 한 과목이라도 40점에 못 미치면 과락으로 불합격 처리되고, 1차에 합격하고 2차에 떨어진 사람은 이듬해 한 차례에 한해 1차 과목 시험이 면제된다. 대부분의 응시생들은 “지나치게 어려웠다”고 원성이 집중된 공동주택시설개론에서 과락을 맞았다. 이병술 재시험추진위원회(재추위) 위원장은 “2006년 9회 시험에서 1차에만 붙었던 2009명이 모두 지원했다고 쳐도, 이번 1차 시험 합격율은 5.8%를 넘지 않는다”면서 “누가 봐도 1차 합격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제를 어렵게 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2006년의 1차 시험 합격률은 21.5%였다.

박씨는 2007년 10월25일 비슷한 의견을 가진 수험생 3800여 명과 함께 재추위를 만들었다. 그들은 분당 주공 본사와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설교통부가 있는 과천 정부청사 등을 쫓아다니며 집회도 열었다. 그 와중에 박씨는 “근무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직장에서 사직 권고를 당했다. 그는 현재 실직 상태다.

거리로 나선 이들 대부분은…

주공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조대기 주공 주택관리사보 시험관리단 차장은 “문제를 출제할 때 합격률을 미리 정해놓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마다 합격률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응시생 이길훈(45)씨는 “수능은 한 문제 때문에 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퇴하는데 일곱 문항에 문제가 있었던 이번 시험은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모두 힘들게 시험을 준비해온 사람들인데, 이번 시험은 우릴 탈락시키기 위해 실시된 것 같아요.” 거리로 나선 이들은 대부분 40·50대 가장들이다. 그들은 이 겨울을 어떻게 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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