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테마파크 개발이 진행 중인 제주에서 ‘걷기 관광’을 제안하는 사람들
▣ 서귀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무슨 흙이 이렇게 폭신폭신해. 발이 호강하네, 호강해.”
12월22일 오전 10시30분, 제주 기암 외돌개가 보이는 서귀포 바닷가에서 걷기를 시작한 30여 명의 사람들이 흙길을 밟으며 한 마디씩 탄성을 내질렀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바람에 쪼개져 만들어진 제주의 흙은 공기를 많이 머금고 있어 밟으면 푹신하다. “지금 여기가 겨울 맞아요? 싹이 올라오는 것이 봄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제주도 전통 떡인 오메기떡을 오물오물 씹던 사람들은 파릇하게 싹이 올라오는 착생식물들, 보랏빛 쑥부쟁이, 노란 들국화를 지척에 두고 걸으며 계절을 잊었다. 간간이 부는 바닷바람도 봄바람인 양 보드랍다.
국민소득 3만달러는 돼야 ‘걷기 관광’?
이날은 제주도에서 ‘걷는 길’을 만들고 있는 (사)제주올레가 ‘세 번째 제안하는 길’(3코스)을 걷는 날이다. 전날인 21일 제주칼호텔에서 열린 ‘또 하나의 문화·관광 모색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직접 ‘대안관광’의 하나인 제주올레 걷기를 체험하느라 모였다.
제주올레가 제안하는 세 번째 ‘길’은 모양이 늠름한 장수 같아 몽골군을 일거에 물리쳤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바위 외돌개를 바라다보는 곳에서 시작한다. 길은 돌베낭길(돌베는 ‘도마’의 제주 토속어로, 잎이 돌베처럼 넓고 편평한 나무를 돌베낭이라고 한다)로 이어져 민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강정천을 지나 월평포구에서 끝난다. 서귀포시를 감싸는 바다를 따라 걷는 10.9km 코스다.
2007년 9월 (사)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대표는 “제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길을 통해 제주의 자연을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하고, 지친 삶에 위로와 감동을 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올레꾼’이 됐다. 이를 위해 걷다가 끊어지지 않고, 가다가 자동차가 위협하지 않는 제주의 길을 찾아내고 만드는 게 그의 일이다. 주마간산식으로 훑고 지나가는 ‘렌터카 관광’이 아닌 제주도 구석구석을 발로 기억할 수 있게 한다는 ‘느린 제주의 꿈’을 만들려는 이들의 실험은 어디까지 왔을까.
“‘걷기 관광’은 국민소득 3만달러는 돼야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운동’ 이상이 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21일 열린 토론회에서 제주도 지역의 한 여행사 사장이 말했다. 아직 한국 사회의 관광은 ‘단순히 걷는 일’을 비싼 항공료 내고 와서 할 만큼 ‘수준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 ‘걷기’는 가진 자의 풍요, 몇몇 ‘관광 얼리어답터’들의 사치라는 인식은 제주 지역 여행사, 관광정책 담당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 탓인지 지금 제주에는 ‘건설·개발’을 통한 관광 준비가 한창이다. 2007년 9월, 제주도는 중문·표선·성산포 3개 관광단지와 20개 관광지구를 2008년까지 재정비하는 데 6조162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개발사업자가 정해지지 않은 우보악·만장굴·송악산 등 7개 관광지구를 제외한 16개 관광단지·지구는 개·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이다. 이 중 6개 관광지구에 골프장이 새로 들어서고 2개 관광단지에는 영화박물관, 영상문화단지가 지어진다.
“어딜 가나 비슷한 시설은 기억도 안나”
마침 토론회가 열린 21일 서귀포시 안덕리에서는 400만㎡ 규모의 종합 리조트 단지 ‘신화역사공원’ 착공식이 열렸다. 신화역사공원은 미국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영상 테마파크, 세계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세계 식음문화 테마파크,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워터파크 및 쇼핑단지로 이루어진다. 예산만 1조5천억원이다. 이외에도 섭지코지의 피닉스 아일랜드 건설 등 각종 테마파크 건설이 제주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다.
오창현 제주도 관광정책과장은 “제주는 서울 근교를 가듯 차 타고 버스 타고 오는 게 아니라 항공료를 내고 찾아야 하는 곳이므로 사람들은 특이한 체험거리와 즐길 거리를 찾는다”고 말했다. 이런 ‘즐길 거리’와 ‘체험거리’를 위해 시설 인프라를 조성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주를 가도, 제주를 가도, 부산을 가도 심지어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테마파크는 ‘한 번 와서 즐길 거리’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유진 국제평화교류협회 이사장은 “어딜 가도 똑같은 테마파크 건설에는 제주만의 특색이 녹아 있지 않아, 땅에 대못을 치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형숙 기자는 “예전에 제주도에 와서 중문관광단지, 소인국 테마파크, 미로공원 등을 돌아본 적이 있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며 “머물던 민박집 동네를 걸으면서 봤던 돌담길만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직접 걸으면서 기억한 제주의 속살과 체취가 제주를 다시 찾게 하는 힘이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걷기’든 다른 무엇이든 제주도 고유의 지역성을 살린 관광상품 개발이 절실하다는 게 관광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김의근 탐라대 교수(관광산업학)는 “관광이 제주도 산업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현재 여건에서 지금 제주도는 국내외 관광지와의 경쟁관계는 심화하고 있지만, 제주도만의 차별성이나 정체성은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다양한 관광객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제주도만의 차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자연환경-사람살이’를 관전 포인트로
제주의 고유한 관광자원으로서 ‘환경’은 빼놓을 수 없다. 22일 ‘걷기’에 동참한 숲생태학자 차윤정씨는 이번에 두 번째로 제주도를 걸었다. 그는 “‘왜 제주도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난대림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섬’이라고 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지금 여러 관광지에 흩어져 있는 자연과 문화에 대한 해석이나 정보를 모두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라며 “이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공한다면 사람들이 취향에 맞게 원하는 정보와 문화가 모여 있는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을 잇고, 그 길에 있는 제주 고유의 자연환경과 문화들, 즉 ‘관전 포인트’를 정립한다면 ‘걷기 관광’이 훌륭한 대안관광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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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이 분출한 작은 화산구가 나지막한 산을 만든 오름이나 오름 속 숲 곶자왈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 지형이다. 분출한 용암이 크고 작은 돌들로 쪼개져 곶자왈 바닥에 깔려 있다. 이 때문에 바닥이 오돌토돌한 요철 모양이다. 요철 사이로 지하수가 고여 보온·보습 효과를 주는 덕에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독특한 숲이 된다. 송시태 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는 “이렇게 오름과 곶자왈이 이어지는 지형을 지질공원으로 지정하고, 걸을 수 있도록 약간의 길만 정비한다면 그것만으로 제주 고유의 ‘느낄 거리’가 될 텐데 지자체가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지질공원 지정은 필수인데, 이런저런 개발을 위해 도에서 일부러 지질공원 지정을 피하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며, 제주 천혜의 자연환경에 ‘개발 쓰나미’가 불어닥칠까 걱정했다.
지역 고유의 사람살이도 그 지역의 정체성이 된다. 장희정 신라대 교수(국제관광경영학)는 ‘칫따슬로’를 강조했다. 칫따슬로는 패스트푸드, 대형 할인점, 백화점이 없는 ‘느린 도시’를 뜻하는 이탈리아 말이다. 칫따슬로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관광상품이 된다. 유기농 과일과 와인, 느지막이 문을 여는 레스토랑 등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이탈리아 오르비에토가 대표적이다. 장 교수는 “제주에서도 이렇게 지역민의 삶을 여행자들이 느끼고 체험하고 또 ‘살 수’ 있다면 대안관광지로서 발전하는 유력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안관광은 ‘지역의 정체성 → 자연환경 보전 → 지역민과 관광객의 대등한 관계 → 관광으로 인한 혜택의 지역 흡수’라는 네 단계를 거친다고 얘기된다. 관광상품이 지역민, 즉 사람을 기반으로 개발되고, 또 그 혜택을 지역민이 누릴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한 관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민과 교감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강화올레’를 통해 강화도 걷기를 하고 있는 이유명호 한의사는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한 음식들을 먹고, 재래시장에서 토착 생산물들을 사는 것도 큰 재미”라고 말했다. 싱싱한 해물을 뚝배기에 넣고 맑게 끓인 해물뚝배기,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제주 해역에서 자생하는 몸(모자반)을 넣어 끓인 몸국, 모밀을 넣어 찰지고 담백한 제주도 순대 등을 꼽을 수 있다. 길을 걷다 들른 재래시장에서 산 토속 생산물을 택배로 지인에게 부치는 것도 지역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야들야들한 문어, 우럭, 옥돔, 미역, 갑오징어 등이 싸고 싱싱하다. 제주에서만 나는 자리(생선)는 한 소쿠리 가득에 4천원 정도다.
“건설 예산 1%라도 ‘다른 관광’ 위해”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지역민의 삶 속으로 여행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방안을 짜내고, 도처에 흩어져 있는 길들을 잘 찾아내 거기에 이야기를 담는 일이다. 서명숙 대표는 “이런 일들을 위해 지자체에서 기존의 길을 잘 찾아내 소개하거나, 수조원이 들어가는 관광단지 건설 예산액의 1%만이라도 제주 지역의 ‘다른 관광’을 위해 할애한다면 제주 지역 관광이 좀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대안관광이든, 대량관광이든 떠나는 사람은 그곳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골프장, 영상문화단지, 곰인형박물관은 ‘아, 이렇게 번쩍거리고 크구나’ 이상의 감흥을 주기 힘들다. 많은 벌이를 위해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 바쁨만큼 휴식이 필요하다. ‘쉼’에 대한 갈망은 일상이 바쁠수록, 욕망이 넘칠수록 비례해서 커진다.
제주는 1년 내내 따뜻한 날씨, 산호초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바다색, 독특한 역사 등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1천만 관광객 시대를 일군 일본 최남단의 관광지 오키나와를 꿈꾼다. 500만 관광객 시대를 넘어 1천만 관광객 시대로 가기 위해 제주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굳이 돈으로 따지자면 먼저 ‘3만달러식 여유’를 갖고 ‘2만달러로 쫓기듯 사는 사람들’을 유인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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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방학특집 걷기행사
1월9~12일 제주올레가 방학특집 걷기 일정을 마련했다. 사흘 밤을 제주에서 묵으면서 1월의 제주를 구석구석 밟고 느낄 수 있다. 걷는 길은 1코스(시흥초교~섭지코지), 2코스(쇠소깍~범섬), 3코스(외돌개~월평포구)에다 방학특집으로 중문코스(대포항~중문)가 더해진다. 참가는 3박4일 전일정·부분 일정 모두 가능하다. 문의 www.jejuoll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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