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분해되지 않아 생태계 교란, ‘폐의약품 수거제’ 종로구·도봉구만 실시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약도 분리수거해야 돼요? 처음 듣는 얘긴데….” 서울시 도봉구의 한 약국에서 만난 주부 박태분(53)씨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기자에게 되물었다.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약을 먹고 버려온 박씨에게 “약도 분리수거 대상”이라는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종이·캔·병·음식물 쓰레기 등을 분리수거하는 것은 이제 상식이지만, 약도 가려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직 먼 나라 얘기이다.
하수처리장의 약물, 선진국 8배
물약을 하수구에 흘려버리거나 먹다 남은 알약을 무신경하게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내에서 생산되는 약에 사용되는 물질은 1천 종이 넘는다. 감기약, 두통약, 해열제, 진통제, 연고 등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약들을 그냥 버리면 이 성분들이 그대로 자연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성분들이 자연 분해된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제조된 약들은 공산품처럼 쉽게 변질되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만들어져 자연 상태에서는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생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주 소량이라도 호르몬제에 노출된 물고기는 성별이 바뀌고, 항생제에 노출된 물벼룩은 번식률이 뚝 떨어진다. 항우울증제 성분이 녹아 있는 물에서 자란 올챙이는 알에서 깬 지 두 달이 지나 개구리가 될 시점에도 여전히 올챙이 상태다. 성장이 늦어져서다. 명승운 경기대 교수(분석화학)는 “호르몬제는 생태계에서 성을 교란시키고, 항생제는 내성균을 자라게 해 사람이 이 균에 감염되면 치료가 힘들 수 있다”며 자연에 유출된 항생제와 호르몬제 등 의약물질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런 위험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부터 ‘약품도 유해화학물로 분리해서 별도 처리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강과 하천에서 계속 위험 수위의 의약물질들이 검출되면서 ‘폐의약품 수거·안전 처리’의 필요성도 커졌다. 2005년 광주과학기술원 발표에 따르면, 서울·부산·대구·광주·나주 등 전국 5개 도시 하수종말처리장 수질을 분석한 결과 콜레스테롤 저하제, 해열제, 진통제 등이 유럽 등 선진국보다 3~8배 많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국립환경과학원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4대 강과 축산 농가 근처에 있는 하천 20여 곳에서 수질 검사를 하자 다량의 항생제 성분과 호르몬제 성분이 검출됐다.
폐의약품 분리 배출 운동이 시작된 지 2년째, 바뀐 게 있을까. 지난 10월15일 종로구 약사회, 환경운동연합 등이 주최한 ‘가정 내 폐의약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토론회에서는 “폐의약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제약회사가 폐의약품을 수거하게 하거나 정부가 직접 수거한다는 규정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쏟아졌다. 고영자 환경운동연합 간사는 “얼마 전 서울시 중구 주민이 폐의약품을 동네 약국에 가져갔지만, 약국에서도 따로 버리는 방법이 없다고 해 약을 환경운동연합 사무실로 가져왔다”며 “사람들이 약을 제대로 버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는 실정”이라며 정부의 빠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변기에 버리려던 약도 챙겨서…
이날 토론회에서는 서울시 종로구 약사회가 실시한 ‘폐의약품 수거 현황’이 공개됐다. 종로구 약사회는 지난 8월 종로구에 있는 80개 약국에 폐의약품 수거함을 설치했다. ‘쓰다 남은 약, 유통기한이 지나서 못 먹는 약은 여기에 버려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상자다. 두 달간 이 상자에 모인 못 쓰는 약은 무려 100㎏.
수거한 약을 분석한 결과 호르몬제와 항생제가 주목할 만하게 나왔다. 최면용 약사(종로구 약사회 부회장)는 “수거된 100kg 중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특히 심각한 호르몬제가 2.8kg, 항생제가 2.9kg였다”며 “전국적으로 수거되지 않은 약을 생각하면 각 가정에서 버려지는 양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임 한국환경정책연구원 연구원은 “이 약들이 그냥 하천으로 흘러들어갔거나, 쓰레기 소각장에서 태워져 공기 중으로 방출됐을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했다.
종로구가 약사회 차원에서 폐의약품 수거함을 마련했다면 서울시 도봉구는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나선 경우다. 지난 4월 도봉구에 있는 134개 약국에는 폐의약품 수거함이 설치됐다. 지금까지 이를 통해 모아진 폐의약품은 모두 400kg에 달한다. 광장온누리약국 최귀옥 약사(47)는 약국에 온 손님들에게 왜 약을 그냥 버리면 안 되는지 설명돼 있는 팸플릿을 일일이 나눠준다. 최 약사는 “손님들이 처음에는 ‘귀찮다’며 투덜대다가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면 다음번에 올 때는 집에서 굴러다니던, 변기에 버리려 했던 약들을 챙겨서 갖고 온다”고 말했다. 이렇게 모아진 약들은 도봉구 보건소가 정기적으로 수거해간다. 보건소는 이를 고온의 ‘특수 소각 처리장’에 가져가 안전하게 폐기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폐의약품을 ‘특수 처리’하는 곳은 도봉구와 종로구 보건소뿐이다. 외국은 어떨까.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하천, 토양에서 약품이 검출되자 곧바로 문제를 인지하고 제약회사들이 폐의약품을 무료로 수거하는 제도(Medication Return Program)를 실시하고 있다. 스웨덴은 폐기 시스템을 만드는 데서 한발 나아가 아예 약들의 환경유해성을 표시한 라벨을 만들어 붙이는 라벨 제도를 지난해부터 시행 중이다. 약 성분이 환경에 유해한 정도를 1, 2, 3, 4등급별로 분류해 라벨에 붙이면, 소비자들은 이에 따라 쓰고 남은 약품을 버린다. 두 제도 모두 정부의 지침에 제약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이다.
우리 정부는 2005년에 문제 제기가 나온 이래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조사 중’ 간판만 내걸고 있다. 마수윤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 사무관은 “강과 하천으로 흘러들어간 항생제나 호르몬제들이 가정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축산 농가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제약 공장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며 “정확한 유입 경로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제약회사에 책임을 지우기도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제약회사는 책임 없다?
폐기물에 대해서 해당 회사에 책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환경분담금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이다. 환경부담금은 껌, 기저귀, 담배 등 환경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회사에 처리비용을 부담시키는 제도이고, EPR는 금속캔, 전자제품, 유리병 등 해당 물질을 재활용할 수 있는 품목에 한해 생산자가 폐기물을 회수해서 재활용하게 하는 제도다. 그러나 환경부는 “의약품의 경우 ‘반드시 폐기물이 발생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환경개선부담금을 부과하기 어렵고, 약은 재활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EPR 대상도 아니다”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환경부의 이런 태도에 대해 최경호 서울대 교수(환경보건학)는 “현재 약이 환경에 유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성분이 인체와 환경에 유해하다는 것도 다 밝혀진 사실”이라며 “정부가 현재 있는 법에 기대지 말고, 좀더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관련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폐의약품 수거 시스템’을 정부가 마련하지 않는 가운데, 각종 약들의 항생제 성분, 호르몬제 성분들이 야금야금 강물로, 공기 중으로, 흙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정부의 조사도 중요하지만, 조사하는 동안 버릴 데가 없어 결국 쓰레기통과 하수구로 직행한 약들이 10년 뒤, 20년 뒤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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