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떠난 뒤 들이 내려다 보이는 산을 오르는 노인들… 활동가들은 센터 열고 백서 준비
▣ 평택=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빨리 나와, 어여!”
정태화(72) 할아버지가 웃으며 노인회관 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잠깐 기다려.” 옷매무새를 추스르던 송재국(70) 할아버지가 말을 받았다. 10월3일 오후 4시20분. 단출한 옷차림에 등산화를 신은 노인 6명이 마을 노인회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노인들은 마을 주민 김택균(43)씨가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근처 야산으로 산행을 떠나는 길이다.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이 이어지던 지난 3월까지 그의 공식 호칭은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이하 팽성대책위) 김택균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4년 만에 다시 ‘택균이 형님’이 됐다.
김씨는 “이 시간쯤 되면 어르신들 심심해하실까봐 근처 아산에 있는 고용산에 간다”고 말했다. 고용산은 해발 295.8m의 야트막한 산으로, 날씨가 좋은 날 정상에 오르면 이제는 주민들의 것이 아닌 대추리·도두리의 너른 벌판을 볼 수 있다. 김 사무국장과 노인 6명, 오랜만에 대추리를 찾은 평택 지킴이 해밀, 2006년 6월19일부터 매일 주민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온 ‘들소리’ 방송국 이하연(30)씨가 산을 올랐다. 산은 높지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 쉽게 오를 수 없다.
“꼭 다시 돌아와 항아리를 캐겠다”
할머니들은 노인회관으로 꾸며진 105동 101호에서 고스톱을 쳤다. 노인들은 매일 아침 평택시에서 제공하는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이전주민 특별 일자리’를 받기 위해 읍사무소 앞으로 모인다.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두 시간, 오후 3시부터 4시30분까지 한 시간 반. 노인들은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벽보를 떼어낸 대가로 읍사무소에서 하루 3만3천원을 받는다. ‘특별’자가 붙어서 그런지, 일반 공공근로 일당 2만7천원보다 6천원 많다. 한 가구당 두 명은 할 수 없고, 11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날씨가 추워지면 할 수 없고, 만 75살 이상이면 할 수 없다. 김월순(70) 할머니는 “오늘은 노는 날(개천절)이라 일이 없어 그냥 쉰다”고 말했다.
“그래도 흩어지지 않고 이렇게 있으니 좋아. 새 마을이 생기면 그쪽으로 빨리 가고 싶어.” 초등학교가 무너지던 날, 포클레인에 뽑히던 버드나무를 보며 울던 김금순(72) 할머니가 말했다. 새로 대추리 노인회장이 된 방승률 할아버지의 손자 병철(8)이는 쿵쿵쾅쾅 노인회관을 뛰어다녔다. 팽성에서 ‘특별 일자리’를 제공받는 사람은 모두 92명이다. 마을의 일상은 너무 평화롭고 고요해 낮설어 보였다.
노인들이 대추리를 떠난 것은 지난 3월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부에 굽히지 않았던 주민 44가구는 국방부가 한 집당 7천만원에 세를 얻어준 송화3리 빌라촌 ‘for U’로 이사갔다. 봄내 심하던 황사가 한풀 꺾였던 4월7일 주민들은 대추초등학교를 찾아 곡식을 내다팔 때 썼던 됫박,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낟알, 성모상, 옷, 손때 묻은 도장 등을 항아리에 담아 운동장에 묻었다. 얼굴을 감싸쥐며 울던 신종원 대추리 이장은 “꼭 다시 돌아와 항아리를 캐겠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함께 2년 반 동안 대추리를 지켰던 지킴이들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4월9일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사람들은 다시 살게 마련이다. 김택균 사무국장은 “그래도 한 마을에 모여 산다는 게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이 따로 떨어졌으면 아마 많이 힘들어하셨을 거야. 그래도 여기로 같이 왔으니까 서로 의지하며 사시는 거지.” 김지태 전 대추리 이장의 어머니 황필순(77)씨는 “같이 살다 보니 갑갑해도 크게 불편하진 않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앞으로 농사를 지어야 할지, 장사를 해야 할지, 취직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을 빼먹으며 산다.
투쟁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새로 붙든 화두는 ‘기억’이다. 강상원 ‘평택평화센터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이대로 사람들이 흩어지면 지난 4년 동안 계속된 평택 투쟁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말했다. 평택의 활동가들은 평택 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기억’하기 위해 미군기지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대중적인 상설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그 구체적인 결과물이 평택평화센터다. 평화센터는 앞으로 평택 투쟁을 이어나가는 구심점이 된다.
MD 벨트 막으러 군산으로 간 사람들
대추리 사람들은 지난 투쟁의 역사를 정리한 백서를 펴내기로 했다. 2005년 9월부터 평택대책위 간사로 활동하던 이유빈씨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활동가 장도정씨가 지난 4년 동안의 투쟁 일지를 모았다. 김 사무국장은 이를 위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카페(http://cafe.daum.net/ktg11104)를 개설해 백서에 들어갈 자료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백서 편찬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기본 자료는 이미 확보됐고, 이제 집필에 들어가야 한다”며 “이르면 연말께 백서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지킴이들은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지킴이 여름은 “마을을 떠난 뒤 많은 사람들이 열패감에 힘겨워했다”고 말했다. 먼저 추스르고 일어난 사람들은 고참 활동가들이다. 평택범대위의 공동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평화바람 활동가 오두희씨는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은 그가 문정현 신부와 함께 미군기지 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사람들의 눈이 평택으로 향한 사이 군산에서도 미군기지 확장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택의 농민들을 내몰고, 군산의 농민들을 내몰아 미군이 만들려는 것은 서해안의 평택~군산~제주도를 잇는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 벨트다. 그는 5월28일 군산 미군기지 앞에서 미군기지 범죄 상담소를 개설했다.
한신대 01학번이던 이유빈씨는 미군기지 문제를 고민하는 활동가가 됐다. 2004년 농활을 위해 평택에 들른 이씨는 대추리를 그저 외면할 수 없었다. 1년이 지난 2005년 9월 팽성대책위 간사가 됐고, 이제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수습 활동가다. 대추리의 첫 지킴이였던 마리아는 고향 대구로 돌아갔다. 그는 4월7일 평택의 논을 갈아엎는 포클레인에 매달리다 한쪽 팔이 부러져 한동안 깁스를 하고 다녔다.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일지로 정리하는 중이다. 지킴이 네모는 농사꾼이 됐다. 송태경 팽성대책위 기획부장의 도움을 받아 평택 땅 1천 평에 농사를 지었다.
평택에서 1년 동안 먹고 자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던 일본인 프리랜서 작가 나카이 신스케는 일본에서 평택 투쟁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고 있다. 영화는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나카이의 통역자로 일하던 모리 기쿠코는 도키치현에 있는 한국계 회사에 통역으로 취직했다. 가끔 한국에 나올 때마다 평택에 들른다. 그는 “주민들이 따뜻하게 맞아줘 계속 대추리에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킴이 두시간은 “진안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새 평택 투쟁의 상징이 돼버린 문정현 신부는 지난여름 강행한 단식 투쟁의 여파로 건강을 많이 해쳤다. 익산에서 요양하며 군산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9월7일, 대추리 주민들은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군산 주민들이 연 군산 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평택에서 네 번의 평화대행진을 치르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잡히고, 깨지고, 피흘렸다. 행사에 참가한 민병대(70) 할아버지는 “우리랑 처지가 비슷한데, 외부에서 도와준다고 왔을 때 정말 힘이 펄펄 나곤 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농민들 혼자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내가 온 거야.” 오두희씨는 그 말을 듣고 “그래도 완전히 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100년 기지를 만들러 꼬리 무는 트럭들
10월3일 취재진이 찾은 평택의 너른 들은 예전의 그 들이 아니었다. 경찰 검문소가 설치됐던, 그래서 수많은 평화 활동가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대추리 삼거리에서 경찰 초소는 철수했다. 평택 내리를 거쳐 미군부대를 뺑 돌아 쳐진 펜스를 따라 대추리까지 진입하는 취재차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의 모든 건물은 이미 파괴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황새울에서는 미군들이 ‘100년 동안’ 쓸 수 있는 튼튼한 기지를 만들기 위한 성토 작업이 한창이었다. 근처 야산을 허물어 만든 골재를 실은 25t 트럭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뒤따라온 경찰차가 “나가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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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원(37)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은 ‘평택평화센터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변해 있었다. 범대위에서 평택 투쟁을 이끌던 그는 2006년 4월 공무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져 2006년 6월 옥에 갇혔다. 그해 9월 출소한 그는 정부의 압박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 주민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 했다.
평택의 활동가들은 “평택은 왜 부안이 되지 못했나”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평택평화센터다. 센터는 평택에서 미군 문제를 고민하는 상설적인 모임으로 10월5일 개소식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대추리 싸움은 끝났다. 평화센터를 만든 이유는.
= 우리는 투쟁이 끝난 지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89년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때도 평택에서는 대책위가 꾸려져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시민들의 호응이 매우 좋았다. 다행히 이전안은 백지화됐고, 대책위는 해체됐다. 2002년 다시 미군기지 확장 얘기가 나왔다. 다시 대책위가 꾸려졌다. 그러나 10년 전의 투쟁 경험은 축적되지 못했고, 미군기지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문제가 생기면 대책위를 꾸려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시민들과 호흡할 수 있는 상설기구가 절실했다.
비용 문제는.
= 미군기지 확장계획이 발표된 직후, 미군기지가 확장되는 서탄면 금각리 땅을 한 평씩 사들이자는 운동이 시작돼 605명이 동참했다. 국방부는 대추리·도두리 땅을 강제수용하면서 이 땅도 강제수용했다. 그렇게 쌓인 공탁금이 1억2천만원이다. 2006년 4월28일 회의를 열어 그 돈을 어떻게 활용할지 의견을 모았다. 지주들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공탁금 8100여만원을 평화센터 창립 기금으로 써도 좋다고 동의해주셨다. 그 돈으로 평택시 비전동 806-2번지 1층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내게 됐다.
활동 계획은.
= 가장 큰 고민은 ‘우리는 왜 부안처럼 되지 못했나’였다. 투쟁이 지나치게 ‘확장 반대’로 좁혀져 대추리와 도두리만의 문제로 협소화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미군기지를 둘러싼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지 못했다.
지금이 어떤 시점인가. 남북한 두 나라 지도자가 만나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고, 북-미 관계가 진전돼 북핵 문제 해결 전망도 밝다. 그럼에도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미군이 100년 동안 끄떡없게 살 수 있는 미군기지를 짓는 게 어울리는 문제인가. 그런 고민들을 안고 시민들에게 나아가고 싶다. 우선 한 달에 한 번 시민들을 대상으로 현안을 둘러싼 강좌를 열 계획이다. 센터 운영위원들 가운데 선생님들이 많은데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도 생각하고 있다. 평택 투쟁을 공부하기 위해 순례단이 자주 오는데 이분들을 위한 영어·일어 등으로 된 교재와 순례 프로그램 등을 만드는 것도 과제다. 물론, 주한미군 범죄신고 센터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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