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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교 유철이와 애자의 꿈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최전성기의 4분의 1로 줄어든 학생 수… 지원금·학력 인정 등 일본 정부의 벽은 여전해

▣ 오사카=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기자 yorogadi@hotmail.com

방문은 늘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낯선 길을 걷다가 ‘조선학원’이라는 간판이 나올 때마다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서는 “언제든지 편하게 오라”며 일행을 맞았다. 방학을 맞은 학교는 조용했고, 운동장에서는 모자를 눌러쓴 꼬마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 때도 북으로부터 지원금

학교를 방문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반공 정권의 눈에 ‘조선학교’는 곧 간첩 양성소로 보였던 모양이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는 2003년 겨울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궁금증 때문에 그런 학교 문 앞에서 어정거리면 끌려들어 간다고도 했고, 그 안을 구경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3월 홋카이도 ‘조선학교’ 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다큐 영화 가 3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모으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새삼스레 ‘조선학교’에 감동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량학철(47) 히가시오사카 조선제4초급학교 교장은 “우리 민족끼리인데 감추고 말 것도 없다”며 웃었다. 조선제4초급학교가 생긴 것은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은 이듬해인 1946년이다. 해방을 맞던 1945년 8월께, 일본에 남아 있던 조선인은 약 200만 명에 달했다. 그해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35만 명이 고국으로 돌아왔고 65만여 명이 일본에 남았다. 일본의 조선인들은 1945년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만들어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키우기 위한 민족교육을 시작한다. 조련이 터를 일군 민족교육 사업은 1955년 5월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로 이어졌다. 처음 ‘조선학교’를 정착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흘렸던 피땀이나, 이를 폐쇄하려고 일본 당국이 벌인 탄압에 대한 일화들은 너무 많아 일일이 글로 옮길 수 없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재일 조선인들을 둘러싼 환경도 변하기 시작했다. 1954년 2만4천여 명 수준이던 조선학교 학생 수는 1960년 4만6294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 조항에 해당하는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선학교가 재일 조선인들 사이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재일동포 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153차례에 걸쳐 460억622만엔을 지원했다. 가장 최근에 보내온 153차 지급액은 2억3800만엔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지원금은 끊기지 않았다.

2007년 현재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130여 개 학교에서 1만2천여 명 남짓이다. 조선학교의 크기는 최전성기에 견줘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히가시오사카 조선제4초등학교의 총 학생 수는 현재 134명. 이 가운데 6학년 28명은 내년에 졸업을 한다. 그 아이들의 빈자리를 메워줄 신입생을 받을 수 있을까. 량 교장은 확신하지 못했다.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일까

학생 수 감소는 조선인 학교가 감당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지도 모른다. 일본 사회에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려면 만만치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 정부는 일본 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한 사람에게 1년에 98만엔을 지원해주지만, 조선학교 학생들에게는 87엔을 지원한다. 량 교장은 “일본 학교에 보내면 점심 급식값만 내면 되지만, 우리 학교에 오려면 꽤 큰 경제적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내는 돈은 한달에 1만5천엔. 아이가 세 명이면 학부모들의 부담은 5만원 수준으로 올라간다.

학교를 나와도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김광민(36) 코리아엔지오센터 사무국장은 “일본도 한국 못지않은 학벌사회”라고 말했다. 조선학교는 아직까지 일본 국내법상 ‘각종 학교’로 분류된다. 2002년까지만 해도 조선인 고급학교(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은 일본 국립대학의 수험 자격을 얻지 못했다. 지금은 조선학교 학력을 인정할지를 학교 나름대로 판단하게 했지만,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대는 조선인 학교 졸업생에게 수험 자격을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1세가 많았을 때는 경제적 부담이 있어도 그쪽으로 갔죠. 그렇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2~3세입니다. 예전에 비해 조선학교를 보는 시선이 바뀐 게 사실이죠.”

방학이었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나와 놀고 있었다. 8월6일 오전 11시 반. 3학년 아이들은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유옥이의 꿈은 “음악을 잘하는 것”이다. 유치반의 동생이 노래를 배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2학년 때 9급 한자검정시험에서 148점을 받았는데 올해는 “많이 공부해서 만점을 받겠다”고 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유철이의 꿈은 ‘우리말’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지난해에 본 국어시험 성적은 8.6점이었다. 올해 목표는 국어에서만은 10점 만점을 받는 것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오사카 ‘자이니치 코리안’ 집단촌인 쓰루하시 출신이다. 부모가 모두 일을 하는지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동생들을 잘 돌봐주겠다”고 말했다. 상용이는 “축구대회에서 반드시 1등을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2등을 해서 막 울었다고 한다. 애자의 가장 큰 관심도 ‘동생을 돌봐주는 것’이다. 교실 뒤에 붙여둔 올해 생활 목표를 보니 ‘엄마가 바쁘니까 애화가 오좀(오줌)을 해도(싸도), 애화가 울어도, 애화가 배고파도 나는 언니에(가) 되었으니까 애화를 돌봐주겠어요. 애화는 정말 예뻐요’라고 씌어 있었다.

6학년 아이들의 교실에서는 인공기의 모습과 6·15 정상회담 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포옹하는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전에는 김일성·김정일의 사진을 교실 앞에 붙여놨었는데, 2002년부터 떼었다고 한다. 하긴, 우리 초등학교 운동장에 선 이승복·세종대왕·이순신의 동상을 보고, 북이나 조선학교 아이들도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인공기와 남북정상회담 사진

학교가 사라지면, 그곳에 깃들었던 아이들의 추억과, 그 학교를 지키기 위해 흘렸던 어른들의 고된 투쟁도 잊혀질 것이다. 6학년의 급훈은 ‘사랑하는 마음’ ‘해보자는 정열’ ‘배워보자는 자세’였다. 학생들은 교실 벽에 자주 틀리는 모국어를 써놓고 외우고 있었다. 단어들은 자동계단식 승강기, 먹, 몰두, 서두름, 괴롭다, 멍텅구리, 접대원, 돌멩이, 따끔따끔, 아연실색하다 따위였다. 일본 사회는 학교가 자연 소멸하도록 크고 작은 압박을 가하고 있고, 한국 사회는 뒷짐을 진 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중이다. 김광민 사무국장은 “학교를 죽이는 것은 일본이 외국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라며 “그런 사회를 만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일본 사회에 비난을 퍼붓기에 앞서, 우리는 떳떳하다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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