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아이 낳는 이주여성의 모성보호를 위해 뛰는 사람들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주부 박어진(53)씨가 처음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루안(27·가명)네 집에 갔을 때 생후 일주일 된 아기 그엉의 얼굴은 샛노랬다. 배는 딱딱하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급히 아기를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검사를 위해 아기 등에서 뇌척수액을 뽑았다. 탈수가 심해 뇌척수액이 잘 안 잡혀 아기 등에 주삿바늘을 한 번 더 꽂아야 했다. 베트남에서 온 아기 엄마 루안은 엉엉 울며 “왜 주사를 두 번 놓냐”고 물었다. 의사가 말하는 ‘탈수’ ‘뇌척수액’ 같은 단어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도 울면서 하는 루안의 한국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어진씨가 두 사람의 다리 구실을 해야 했다. 빠르고 어려운 의사의 말을, 쉬운 단어를 써서 천천히 루안에게 옮겼다. ‘한국어-한국어’ 통역인 셈이다.
자원봉사자들이 ‘친정엄마’
다음날,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무료인 국립의료원으로 아기를 옮겼다. 입원과 퇴원 수속을 돕고, 의사의 말을 루안에게 전하고, 설사와 구토를 하는 아기의 상태를 의사에게 알리느라 박씨도 사흘 밤낮을 병원에 머물렀다. 지난 6월에 있었던 루안-그엉 모자와 박씨의 첫 만남이다.
박씨와 루안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모성보호 활동을 통해 만났다. 모성보호 활동은 한국에 와서 아기를 낳은 이주여성을 돌보는 일이다. 임신 6개월 즈음부터 출산 뒤 6~7개월까지 약 1년간 자원봉사자들이 ‘친정엄마’나 ‘이모’ ‘언니’ 노릇을 한다. 아기 낳기 전엔 검진을 받도록 병원이나 보건소에 데려가고, 낳은 뒤엔 산후조리를 돕고, 아기 예방주사를 맞힐 때가 되면 병원에 동행하는 일 등을 한다. 박씨는 “자기 나라에서 친정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도 아기 낳는 일이 쉽지 않은데, 다른 나라에서 혼자 아기 낳는 일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다. 현재 박씨를 포함해 7명의 자원봉사자가 갓 엄마가 되려 하거나 엄마가 된 15명의 이주여성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 자원봉사자 한 명이 2~3명의 이주여성을 돕는다. 박씨의 경우엔 루안과 또 다른 베트남 이주여성 린당(가명)을 돌본다.
8월23일 오전. 박씨는 오랜만에 루안네 집에 놀러갔다. 퇴원한 지 한 달 된 그엉은 6.5kg으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엉의 등에는 아직도 3cm나 되는 뇌척수액 검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배가 고픈지 칭얼대서 박씨가 우유를 먹이자 금세 방긋 웃다가 곧 잠들었다. 두 달 전의 ‘긴박한 상황’을 함께 극복하고 ‘평화 상태’를 맞은 박씨와 루안은 이제 이모-조카 사이가 됐다. 루안은 실제로 박씨를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 오늘 바빠요? 저녁에 같이 청계천 갈래요?” 저녁 약속이 있어 가지 못한다는 박씨의 대답에 루안은 “그럼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며 냉면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같이 냉면을 후루룩 먹으면서 베트남 이주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SBS 드라마 이야기, 옆집 사는 친구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을 쉴 새 없이 나눴다.
모성보호 활동을 통해 만난 한국 여성과 이주여성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에게 시혜를 베푸는 관계는 아니다. 가까운 이웃처럼 육아의 어려움을 상담하고, 노하우도 공유하고, 출산과 출생을 진심으로 축하 해주며 마음을 주고받는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출산한 지 일주일이 안 되는 산모들을 좀더 전문적으로 돌봐줄 수 있도록 서울 YWCA와 연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에 따라 YWCA의 산후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봉사자들이 이 활동을 함께하기도 한다. 루안은 이를 통해 산후조리사 김성숙(54)씨의 보살핌도 받았다. 김씨는 아기가 입원해서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는 루안을 대신해 냉장고 청소, 이불 소독, 밑반찬 만들기 등을 정성껏 했다. “딸한테 해주는 기분으로 했죠. 내 딸이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짠하겠어요.”
한국 땅에서 축하 받는 출산할 수 있도록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2001년 센터 설립 때부터 모성보호 활동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독일에 파견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자가 구성됐다. 전문 지식이 있고, 타지 생활을 경험해본 이들일수록 이 활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다. 최영옥씨도 그랬다. 최씨는 20대 후반, 유학생인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살았다. 독일에서 아이를 낳은 최씨에게 어느 날 옆집에서 직접 구운 따뜻한 케이크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타국에서 젖먹이를 키울 일이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는데, 케이크 한 조각과 ‘축하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무치게 고마웠다”며 “나중에 한국에 오면 나도 꼭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우리는 이주여성 한명 한명의 ‘행복’이 가장 큰 관심사”라고 말했다. “모성보호 활동이 미등록 이주여성의 지위를 합법화하는 등 제도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혼자가 아니다’ ‘언제라도 전화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있다’는 정신적 위안감, 한국이라는 땅에서 누군가의 축하를 받으면서 아이를 낳았다는 따뜻한 기억을 주고 싶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친정 엄마 노릇이 녹록지만은 않다. 권미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관계를 맺는 이주여성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어떻게 보아 넘길까에 대해 자원봉사자들이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활동의 대상자가 미등록 이주여성이다 보니, 기저귀나 분유를 제대로 사기 힘든 이들이 많다. 아무리 마음이 쓰여도 이들에게 기저귓값, 분윳값을 전부 대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이들의 신분이 불안정한 탓에 처음 만났을 때 경계심을 갖고 자원봉사자들을 대하기도 한다. 처음 관계를 맺을 때 이를 인정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은 공식적으로 72만2686명으로 주민등록 인구의 1.5%를 차지한다. 지난해보다 35% 증가한 수치다(행정자치부 집계). 여기에는 불법체류자(2007년 8월 현재 22만5천여 명, 법무부 집계) 수는 포함되지 않아서 실제 외국인은 훨씬 많다. 매년 외국인 수 증가폭이 커지고, 구로구 가리봉동, 동대문구 광희동 등 서울시 곳곳에 외국인 집단 거주지가 활성화되는 등 한국 사회는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다문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대부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설치한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도 결혼 이민자를 대상으로 할 뿐, 이주여성 전반을 아우르지는 않는다. 서울시 14개 여성인력개발센터 중 유일하게 ‘다문화 프로그램’을 마련한 광진여성인력개발센터의 ‘이주여성 요리 프로그램’도 한국인 배우자를 둔 이주여성들이 대상이다. 법과 제도 바깥에 있는 미등록 이주여성들, 특히 세심한 배려와 돌봄이 필요한 ‘아기 엄마’들을 만나는 모성보호 활동은 ‘법과 제도’가 미처 채우지 못하는 틈새를 ‘사람’으로 메운다.
“같이 노는 기분으로 루안 만나”
박어진씨는 “나는 봉사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같이 노는 기분으로 루안을 만나고 린당을 만나요”라고 말했다. “‘짝퉁’ 이모죠, 뭐.” 그런 그가 아이들을 안을 때마다 꼭 속삭이는 말이 있다. “여기는 너희의 나라야, 웰컴 투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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