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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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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진] 백수 태권브이야, 자력갱생하자!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 글·사진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어느 날 태권브이가 할 일을 잃었다. 악당들은 소탕됐고,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덕분에 성태진(33)씨는 먹고살 길을 찾았다. 성씨의 직업은 팝아티스트다. 실직한 태권브이를 주제로 판화를 그린다. 그의 그림 속에서 태권브이는 용맹한 기백을 뽐내는 대신, 100cc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자장면을 배달한다.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사는 로봇이 얼마나 되겠냐.’ 속으로 이렇게 되뇌는 태권브이의 모습은 궁상 그 자체다.

성씨가 아랫배 불뚝 튀어나온 중년의 태권브이를 떠올린 것은 거울 속에서였다. 서울대 공대를 그만두고 25살에 미대 진학을 선택한 그는 그 대가로 졸업과 함께 백수라는 신분을 얻었다. ‘자력갱생’을 위해 성씨는 후배와 함께 서울 홍익대 근처에 판화 학원을 열었다. 낮에는 태권브이를 그리고 밤에는 아이들을 가르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입시에 쫓기는 학생들은 못생긴 태권브이나 그리고 있는 선생님을 찾지 않았다. 학원은 술 취한 친구들의 놀이터가 됐다.

임대료와 관리비 포함, 200만원의 월세를 부담할 방법이 없었다. 찾고 뒤져 결국 아현동에서 보증금 1천만원, 월 50만원짜리 작업실을 발견했다. 감격한 나머지 자력갱생이라는 간판을 떼고 ‘천애오십’이란 새 간판을 달았다. 그때까지도 성씨는 자신의 태권브이 그림이 돈이 될 줄 몰랐다. 2005년 12월의 일이었다. 천애오십을 찾아온 선배는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림이 괜찮은데 한번 알려보자”며 자신의 전시 공간 일부를 내줬다. 작업실에 그득했던 한심한 꼬라지의 태권브이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판화 그림 한 장을 내다팔면 5만원도 받고 10만원도 받는데,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는 된다. “그림을 보고 알아보시는 분도 있고, 우선 싸니까 많이 팔린다”는 것이 성씨의 주장이다. ‘청년실업과 사회 부적응 문제를 태권브이에 오버랩시키면서 현대 사회의 비정함을 꼬집고 있다’는 나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작업실은 여전히 천애오십이고, 삶의 목표는 자력갱생이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기가 어디 쉽습니까.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밥은 먹고 살아요.” 아현동 대로변 구남문짝 건물 2층에선 ‘찌질이’ 태권브이와 자력갱생을 외치는 가난한 예술가의 동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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