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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감정의 골만 깊어지네

등록 2007-06-29 00:00 수정 2020-05-03 04:25

해군기지 찬반 주민투표를 위한 마을임시총회, 욕설과 몸싸움으로 중단돼

▣ 서귀포=김영헌 기자 cogito99@hanmail.net

정부와 제주도가 해군기지 건설 최종 후보지로 선정한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에서 기지 유치 찬반을 둘러싼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거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벌써부터 마을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누가 책임질 텐가?

찬성쪽, 기표소 부수고 투표함 가져가

지난 6월19일 강정마을에선 하루 종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해군기지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위한 마을임시총회가 이날 오후 7시로 예정돼 있었다. 기지 유치에 찬성하는 윤태정 마을회장과 강정 해군기지사업 추진위원회 쪽은 이날 오전 서귀포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마을회 감사단이 직권으로 결정한 마을총회(와 주민투표)는 정당성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마을총회가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을 것임을 예고한 게다. 서귀포경찰서도 주민투표 과정에서 주민 간의 물리적 충돌을 우려해 경찰 병력 투입을 전격 결정했다.

임시총회가 열리는 강정마을 의례회관에는 예정된 시간 훨씬 전부터 주민투표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려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선거인 명부에 이름을 올린 주민만 547명에 이른다. 앞서 기지 유치 찬성 쪽 인사들은 지난 4월26일 “역사장 가장 많은 참석 인원”이라는 80여 명의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총회를 열어 “압도적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바 있다. 총회 시간이 다가오면서 찬성 쪽 주민들도 속속 도착해, 총회가 시작될 무렵 의례회관에 모인 주민은 7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당시 강정마을에 주소지를 둔 유권자는 모두 1480여 명. 이 가운데 학생 등 외지로 나가 있는 젊은 층과 노인층을 빼면 강정마을 성인 가운데 나올 만한 사람은 거의 임시총회에 나온 셈이다.

예정보다 1시간여 늦은 이날 오후 8시께 마을회 감사단이 총회 개회를 선언하기 무섭게, 투표 저지를 위해 미리 의례회관에 앉아 있던 해녀들과 기지 유치 찬성 쪽 주민 수십 명이 단상 앞으로 몰려들면서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부 해녀들은 총회 무효를 주장하며, 회관 안에 설치된 기표소를 부수고, 투표 용지가 들어 있던 투표함을 빼앗아 마을회관 밖에 준비해둔 오토바이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거친 욕설과 몸싸움이 20여 분간 계속되자 회의 진행을 맡은 감사단은 일단 정회를 선언했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던 소란은, 오후 9시40분께 감사단이 투표용지와 투표함을 다시 만들어 들여오면서 이내 재현됐다. 욕설과 몸싸움의 기세가 더욱 격해졌다. 더 이상 투표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고, 감사단은 오후 10시께 총회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투표를 기다리던 주민들은 “투표해!”를 외치며 대부분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양홍찬 강정마을 해군기지유치반대 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나서 기지 유치 반대 서명을 받은 뒤에야 주민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즉석에서 이뤄진 이날 반대 서명에 참여한 주민만도 400여 명에 이른다. 한 주민은 “해군기지 문제가 그동안 평화롭게 지냈던 가족, 친척, 친구 사이를 원수 보듯 싸우게 만들고 있다”며 “해군기지 유치로 얼마나 잘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기지 유치 철회하라! 마을회장 퇴진하라!” 6월21일 밤 9시10분께 강정마을에선 쩌렁쩌렁한 구호가 울려퍼졌다. 이날 오후 제주도청 앞에서 열린 ‘군사기지 철회, 평화염원 도민대회’에 참석했던 강정 주민 150여 명의 외침이다. 집회에 참석한 뒤 밤늦게 돌아온 주민들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마을을 동서로 가르는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집에 있던 주민들도 하나둘 동참하면서 삽시간에 대열은 200여 명으로 불었다. 양홍찬 위원장은 “비록 투표는 무산됐지만 임시총회를 통해 주민들의 반대 의사가 더없이 분명해졌다”며 “그럼에도 기지 유치를 강행한다면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섬’ 제주에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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