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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사학의 사유재산권’ 손들어주다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상지대 정이사 체제 무효 판결’이 품은 수상한 가치관

▣ 남종영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 fandg@hani.co.kr

‘학교가 탈취당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탈취는 ‘빼앗아 가진다’는 뜻이다. ‘가진다’는 의미는 소유의 개념을 내포한다. 학교가 특정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학은 설립자의 사유재산일까. 적어도 5월17일 대법원이 내린 ‘상지대 정이사 체제 무효 판결’은 그런 가치관을 품고 있다.

교육부 파견 임시이사가 선임한 정이사

은 대법원 판결 직후, 소송의 양쪽 당사자와 인터뷰를 했다. “상지대가 좌파 세력에게 탈취당했다”며 정이사 체제를 무효라고 주장했던 김문기 상지대 전 이사장은 “이 나라의 법과 양심이 살아 있다”고 감격스럽게 말했다. 반면 박병섭 상지대 부총장은 “사학 민주화의 걸림돌이 되는 판결로 심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상지대 사태는 뿌리 깊다( 646호, 2월6일치). 1990년대 초반까지 옛 재단(김문기 전 이사장)과 관련해 강사 채용 비리, 건축 로비 의혹과 한의학과 폐지 논란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 전 이사장이 1993년 학교 공금 횡령과 부정 입학 등의 혐의로 검찰에 전격 구속된다. 대법원은 1994년 3월 부정 입학 등의 혐의를 인정해 그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교육부는 상지대에 임시이사를 파견했다. 임시이사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옛 재단 인사들은 물러났다. 임시이사회는 2003년 12월 9명의 정이사들을 선임했다. 김문기씨는 이에 반발해 상지학원(상지대)을 상대로 ‘이사회 결의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냈다. 고등법원에서 김씨가 승소하더니, 대법원은 5월17일 “임시이사들이 정이사를 선임한 것은 무효”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임시이사는 임시적으로 사학의 운영을 담당하므로 후임 정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대법원에 다녀온 김문기씨는 아직도 감격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는 “대학 설립자로서 정신과 재산을 투자한 학교를 14년 동안 탈취당해왔다”고 말했다. 그가 주도하는 ‘상지대 진실규명 및 설립자 학교 찾아주기 운동본부’는 상지대가 좌파세력에게 불법 탈취당했다고 보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정이사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은 ‘좌파’로, 이들이 상지대를 ‘탈취’해 ‘소유’하고 있다. 김씨에게 “상지대가 좌파 대학이냐”고 물으니, 그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했다.

상지대 이사회는 이날로 자격을 상실했다. 대법원은 “교육부가 다시 정이사를 임명하려면 김 전 이사장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이사회는 개정 사립학교법에 따라 구성된다. 교육부는 정이사를 선임할 때 “상당한 재산을 출연하거나 학교 발전에 기여한 자 및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의 의견을 들어”(제25조의 3)야 한다.

횡령한 자가 학교 발전 기여자?

그렇다면 김문기씨는 협의 대상에 속할까. 박병섭 부총장은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대학 내 김씨의 재산은 1억5천만원 정도”라며 “하지만 한의대 입학과 도서관 건축 과정에서 이미 수억원을 횡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를 재산 출연자나 학교 발전 기여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 부총장은 “교육부에 이런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한 김문기씨의 의견을 묻자, 그는 “대법원은 나와 협의하라고 판결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묻지 마라”고 대답했다.

상지대 총학생회는 이날 밤 ‘김문기 재집권 야욕 분쇄와 상지 구성원 한마음 대회’라는 이름의 체육대회를 촛불문화제로 바꿔 열었다. 김선광 부총학생회장은 “김씨의 복귀를 찬성하는 상지대인은 없다”며 “기존 정이사들을 차기 정이사로 재선임할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교육부에 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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