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베이=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루만메이 할머니가 태어난 것은 1926년이다. 대만 중부에 있는 도시 신주에서였다. 할머니가 처음 깨달은 삶의 이치는 ‘가난’이었다. 집은 가난했고 형제는 많았다.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했거든.” 할머니는 고민 끝에 큰아버지 집에 양녀로 들어갔고, 17살이 되던 1943년 “식당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고 다른 소녀 30여 명과 함께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으로 들어갔다. 동행자는 일본인 부부였고, 교통편은 일본 군함이었다.
하이난섬에 도착한 할머니와 또래 소녀들은 군용 트럭에 실려 홍샤라는 지방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바다와 염전뿐이었어. 중간에 나무로 만든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집 앞에는 ‘위안소’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집 안에는 대만 여성과 일본 여성들이 있었다. 그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규정은 간단했다. “한 달에 이틀 쉴 수 있고, 생리 기간에도 쉴 수 있었습니다.” 석 달마다 돈을 지급한다고 했지만,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은 없다. “우리가 자원해서 오지 않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런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거짓말에 속은 거죠.”
위안소에서 1년을 보낸 뒤 할머니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접대’는 계속됐다. 일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임신 8개월 때부터였다. 의사는 할머니에게 증명서를 발급했고, 결국 대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뱃삯은 위안소에서 주인 몰래 모아둔 팁으로 충당했다.
대만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남들의 눈을 피해 이사를 자주 다녔다. 38살 때 아는 사람의 소개로 결혼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지만, 남편은 그가 예전에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혼을 요구했다. 할머니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코코넛을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할머니는 이따금 길을 걷다 “대만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알고 있나요?” 루 할머니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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