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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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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알려드립니다

등록 2007-02-02 15:00 수정 2020-05-02 19:24

프랑스 안시에서 성공리에 비디오아트전 연 로돌프 데몰·박지영 미술교사 부부…일본 자동차 기업 후원 거절하고 뜻에 동참한 인근 제네바 한인들 도움으로 완성해

▣ 안시(프랑스)=글·사진 윤석준 전문위원 semio.besepyto.com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의 작은 도시인 안마스(Annemasse)시에 사는 로돌프 데몰(Rodolphe Demol·39)과 박지영(38)씨 부부는 최근 뜻깊은 전시회 하나를 마쳤다.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한국인 할머니들의 문제를 다룬 비디오아트전 ‘위안부’(Wi han bou)를 지난달 프랑스 동부의 호수도시 안시(Annecy)에서 성황리에 끝낸 것이다. 그동안 본업인 미술학교 강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어 완성한 전시회였기에 두 사람의 감회는 더욱 새로웠다.

이 부부가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문제를 다룬 전시회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프랑스 국적의 미술가인 로돌프 데몰은 한국인 미술가 박지영씨와의 결혼을 계기로 우연한 기회에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그는 미술 전공자였지만 나름대로 역사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부인을 통해 알게 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더 많은 유럽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래서 부부는 2년 전 안마스시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소박한 ‘예술의 힘’으로 이 문제를 유럽에 널리 알리겠다는 바람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소박한 예술의 힘을 믿고…

물론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부부는 초반에 음악, 무용 그리고 영상 예술이 함께하는 제법 규모 있는 공연을 기획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예술가들과 공동 진행한 이 작업은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했다. 그러나 재정 후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일본의 어느 자동차 기업이 후원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행사에 참여하기로 한 일부 예술가들은 이를 찬성했다. 결국 부부는 고심 끝에 이 후원을 거부하고 두 사람만의 작품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부부는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도 가능한 비디오아트를 제작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일본군에게 납치돼 어두컴컴한 기차에 태워져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던 10대 소녀들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막상 기획을 하고 나니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에는 화면 구성에 필요한 한국인 여성 모델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의 안마스시는 인구 6만여 명의 작은 도시로, 이곳에 사는 한국인은 박지영씨가 사실상 유일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 모두 미술학교 일로 바쁜 상황에서 한인이 많은 파리나 베를린 같은 곳에 가서 도움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한국의 지인에게 부탁을 했더니, 요즈음 한국은 초상권, 저작권 문제로 쉽지 않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관련 단체에도 연락을 취해봤지만, 연락이 잘 닿지 않았는지 회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전시장을 다시 온 여학생

이렇게 작업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다행히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 안마스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시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들이었다. 국제기구 근무, 유학, 국제결혼 등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이 부부의 뜻에 기꺼이 동참해 사진 모델이 되어줬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도움들도 잇따랐다. 과거에 한국에서 입양돼 스위스에서 성장한 한인 여성들이 소식을 듣고 사진 모델로 참여한 것이다.

이처럼 여러 사람들의 힘이 모여 작품은 완성됐고, 전시회는 한-프랑스 수교 120돌을 기념하는 행사로 지난해 12월9~23일 프랑스 알프스 산자락의 아름다운 도시 안시에서 개최됐다. 장소는 시민들이 접근하기 쉬운 중심가 쇼핑몰에 위치했는데, 이 전시회의 취지에 적극 공감한 ‘이마주파사주’(Imagespassages)라는 프랑스 예술인 단체가 장소 섭외를 도왔다.

접근성이 좋은 전시회 장소 덕분에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들 외에도 평범한 프랑스 시민들의 발길이 잦았고, 그 결과 지역사회와 지역 언론들로부터도 상당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사는 수도를 중심으로 열려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지방도시에서 개최돼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자평이었다. 특히 로돌프 데몰은 이번 전시회 중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 한 명이 전시장에 들렀습니다. 안시의 중심가 쇼핑몰에 위치한 전시장이었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호기심에 들른 것이었겠죠. 이 소녀는 전시장에 들어갔다 나온 뒤에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것저것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일들을 물어보더군요. 그러더니 그 다음날 전시장에 다시 왔어요. 이번엔 학교 친구들과 가족들을 한 무리 데리고서 말이죠. 이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한다면서….”

이 부부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문제가 전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려면 예술작품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담은 작은 예술작품 하나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결국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올 초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를 주제로 한 새로운 작품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두 번째 작품에는 역사와 현재가 공존

첫 번째 작품이 일본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여성들이 느꼈을 공포를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 작품은 일본 군인들이 자행한 폭력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계획이다. 특히 이번에 기획하는 작품은 “초대형 LCD를 무대 상·하단부에 설치하는 비디오아트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문제의식과 함께 첨단기술의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들께서 지구 반대편 이 먼 나라에서도 작은 힘이지만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 조금 더 행복해지실 수 있지 않을까요?”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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