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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의 표를 무서워하라

등록 2006-12-29 00:00 수정 2020-05-03 04:24

가리봉 서울중국인교회에서 유권자 운동 출범식 연 중국계 여성들…“결혼이민 가정 문제에 관심갖는 후보에게 우리 표를 몰아줄 것”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가리봉 시장은 낯설다. 초행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걸려 있는 간체자 한자 간판이 이국적이다. 거리는 가난하다. 조선족 동포들의 독특한 억양과 어울려 시장 골목은 딱 1980년대 어느 시골 읍내의 풍경이다. 왕순대란 한글이 반가워 들어간 식당의 아가씨는 길을 묻는 기자에게 이북 말씨로 “여기 처음 오셨냐”고 되묻는다. 이들에겐 서울 사람처럼 차려입은 기자가 낯선 이방인이다. 이곳에서만큼은 이들이 소수가 아니다. 서울 가리봉동에 사는 중국계(조선족 포함) 이주민은 5천~6천 명이나 된다. 이 지역 전체 인구의 25%가 넘는다.

적지 않은 인구지만 정치적으론 소수다. 정치권의 누구도 이들에겐 관심이 없다. 지방자치 단체장들과 의회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자리한 가리봉1동 사무소나 더 큰 행정조직 단위인 구로구청의 인터넷 홈페이지엔 이들을 위한 소식도, 정책도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중국계 이주민들이 어렵사리 한국 국적을 취득해 투표권을 얻어가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다른 가리봉동 동민, 구로구 구민, 서울시 시민, 대한민국 국민과 달리 온전한 유권자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편견과 멸시에도 숨죽여왔다”

이들이 나섰다. 국내 최대 결혼이민 여성인 중국계 여성들은 지난 12월17일 가리봉시장의 서울중국인교회에서 유권자 운동 출범식을 열었다. 이날은 중국계 결혼이민 여성 60여 명이 참석한 조촐한 행사였지만, 한국 유권자 운동사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다. 운동은 국내 결혼이민 여성사 최초의 운동이자 참정권을 활용해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찾으려는 첫 운동이다. 이주 여성들은 유권자 운동 선언문에서 이렇게 외쳤다. “그동안 우리는 온갖 편견과 멸시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거권을 통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 권익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결혼이민 여성들과 가정 및 아이들의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만들어 실천하고자 하는 (대통령) 후보에게 우리의 표를 몰아줄 것입니다.”

이들이 “뭉치자!”며 같은 중국계 결혼이민 여성들에게 던진 호소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 던진 호소이기도 하다. 정작 대선 후보나 정당 등 현실 정치세력과 집단이 이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중국계 결혼이민 여성들은 의미 있는 소수가 되기 위한 운동을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07년 12월19일까지 쭉 펴나갈 계획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은 1990~2005년에 15만9942명, 이 가운데 62%인 9만9164명이 중국계다. 이들 모두가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것은 아니다. 중국계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4만5천여 명이 투표권을 갖게 됐고, 잠재적 유권자인 나머지 여성들은 국적이 나오길 기다리는 형편이다.

이주여성들을 두 달간 설득해

유권자 운동의 주인공은 이름과 얼굴이 없는 결혼이민 여성들이겠지만,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이름들도 있다.

중국계 결혼이민 여성 유권자 운동은 한 목사의 머릿속에서 처음 나왔다. 서울중국인교회의 최황규(42) 목사다. 구로에서 8~9년 넘게 중국계 이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펴온 그는 결혼이민 여성들이 인격 파탄자, 알코올 중독 남편들한테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남편들은 대다수가 농촌 출신, 도시 빈민, 재혼자 등으로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업종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사는 것을 지켜봐왔다. 최 목사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교회 차원에서 봉사하는 것으로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며 “이주 결혼여성들이 스스로 나서서라도 문제를 구조적, 제도적으로 풀기 위한 시도들을 고민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아이디어를 처음 접한 이주여성들은 “생각은 좋다”고 했지만, 확신을 갖지 못했다. 투표를 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참정권을 행사하자는 유권자 운동은 선뜻 와닿지 않았다. 중국계 이주민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게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이나 공장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대통령을 투표로 뽑고 그렇게 뽑힌 대통령을 맘껏 욕한다는 것이다. 최 목사는 “이참에 이주민들이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권리를 찾고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패러다임(구조)을 완전히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 목사와 이주여성들의 두 달여에 걸친 설득과 이해의 과정을 거쳐, 유권자 운동 선포식은 빛을 보게 됐다.

유권자 운동 본부는 서울중국인교회이지만 사실 캠페인 성공의 절반 이상은 홍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와 농촌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주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중국어로 발행되면서 주로 한족이 많이 보는 (조명권 사장 겸 편집장)와 한글로 발행되면서 조선족들이 많이 보는 (김용필 사장 겸 편집국장)이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은 캠페인에 큰 힘이다. 격주로 발행되는 두 신문은 서울·안산·수원·대전·대구 등지에서 각각 2만~2만5천 부가량 배포되고, 중국계 이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크다. 이들 신문은 캠페인을 2007년 대선 때까지 계속 연재해나갈 계획이다. 김용필(38) 편집국장은 “사실 지난 대선 때부터 조선족 동포들은 어느 대통령이 돼야 동포 정책이 바뀐다고 생각해 관심은 있었지만, 90% 이상이 대한민국 국적이 없어 투표권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명권(38) 편집장은 이미 발행된 12월22일치에 중국계 결혼이민 여성의 유권자 운동과 관련된 첫 기사가 나간 뒤, “‘관심과 기대가 크다’는 연락과 반응이 많다”고 전했다. 더 큰 바람도 있다. 조 편집장은 “단순히 투표권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중국계도 국회의원이나 시·군·구 의원 등 지방의원직에 나가 중국 동포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싶다”고 말했다.

중국계 지방의원도 탄생하길

피선거권(선출직 공직 후보)은 아직 먼 얘기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회주의 나라에서 살 때는 없었지만 자본주의 나라에 와서 얻게 된 투표권의 중요성을 결혼이민 여성들에게 확산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권자운동본부는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또 처지가 비슷한 동남아 등 다른 곳에서 온 이민여성들도 동참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최 목사는 “2007년 대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뒤 있을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에서도 유권자 운동을 계속 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권자운동본부는 대선 후보 선택의 원칙적인 기준 두 가지를 제시했다. “경제발전과 일자리 창출, 다시 말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후보, 결혼이주 여성들의 가정, 일자리, 자녀 문제 등 지위와 권익을 증진시키고 결혼 사기 피해 등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위한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실천하는 후보”다.

최 목사는 꿈이 있다. 2007년 12월19일 이전 대선 후보를 불러놓고 이주여성 유권자 본부의 이름으로 공청회를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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