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세워져 식민지 조선인들 울분 달래던 터에 다목적 공원 조성 계획… 잠실운동장 생긴 80년대 이후 기능 축소… 자리잡은 노점상과의 갈등 남아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그 경기장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던 축구장 터는 삭막한 아스팔트로 도배된 주차장으로 변했고, 야구장은 빛나던 고교야구 황금기의 추억을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퇴물로 전락했다. 그래도 야구장에는 이따금 경기가 열리긴 한다.
2006년 10월25일, 야구장에선 2006년도 추계 서울시 중학교 야구대회에 참가한 배재와 경원중 학생들이 악송구와 데드볼을 주고받으며 명승부를 펼치고 있는데, 7-2로 앞서가던 배재중이 5회말 대거 6실점 하며 역전당하자 서른 명쯤 자리를 지키고 섰던 관중석에서 간간이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축구장은 2004년 1월16일 청계천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이 모여든 풍물시장으로 변해 화려했던 옛 명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갑자원 다음 규모의 종합운동장”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우리의 기대만큼 길고 끈끈하지 않다.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 그뿐, 사람들은 그곳에 깃들었던 삶의 추억들을 쉽게 잊는다. 개천 복원이라는 업적을 남긴 전임 시장을 따라잡아야 하는 새 서울시장은 지난 10월18일 기자실에 보도자료를 돌려 동대문운동장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서울시는 시설이 노후하고 기능이 저하된 동대문운동장 터에 역사와 첨단, 물과 숲, 문화와 영상이 어우러지는 다목적 공원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공원 옆에는 ‘세계적 디자인·패션 산업의 메카’가 될 6층 높이의 ‘디자인 월드플라자’도 건설된다.
동대문운동장이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25년 10월15일이다. 그 무렵 지어진 건물로는 서울역사(1925년), 경성부청(서울시청·1926년), 동아일보사(1926년), 지금은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1926년) 등이 있다. 그 시절 동대문운동장의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고, 경성부 토목기사 오모리의 설계로 경성부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옛 훈련원 터 2만2700평에 15만5천원을 들여 지었다.
일어로 씌인 총독부 기관지 는 1925년 5월30일치에서 “운동장이 완공되면 고시엔(甲子園)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경기장이 된다”고 적고 있다. 식민지 반도의 옛 수도에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새 운동장을 지었던 일본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성부가 운동장 관리를 위해 만든 ‘조례’ 1조에는 “본 조례에서 경성운동장은 1924년 동궁(東宮)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운동장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동궁은 영친왕 이은이 아닌 훗날 일왕의 자리에 오르는 히로히토를 뜻한다.
운동장의 설치 배경을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후 경성운동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래는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운동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조선에는 배재학당·경신학교·휘문의숙 등 민족학교들의 운동장을 빼놓곤 운동 경기를 펼칠 만한 체육시설이 없었다. 그 때문에 축구나 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민가의 담장을 넘어 장독대를 깨뜨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30년쯤 앞선 시대긴 하지만 영화배우 송강호씨가 주연을 맡아 2002년 개봉된 영화 <ymca>은 신식 경기시설이 없던 당시 조선의 사정을 사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비운의 천재 이영민이 ‘본루타’를 날린 곳
식민지 조선의 가장 큰 체육행사는 연고전이란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는 ‘연보전’(연희전문-보성전문)과 1929년 조선일보사의 주최로 처음 시작된 경평축구였다. 평양팀은 체력을 앞세운 육탄전이 트레이드마크였고, 서울팀은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선수들이 주축이 돼 개인기 전술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 1929년 10월8일 시작된 1회 대회는 서울 휘문중학 운동장(지금의 현대 계동사옥)에서 열렸고, 2회 대회는 1930년 11월28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시내는 거의 철시했으며 경성운동장엔 2만 관중이 운집,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당대 축구계의 최고 스타는 경신학교를 거쳐 보성전문 선수로 활동했던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1910~85)이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반도 선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스웨덴을 3-2로 이기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한다.
축구에 김용식이 있었다면 야구에는 ‘비운의 천재’ 이영민(1905~54)이 있었다. 그는 1930년대 척박한 한국 스포츠계에서 손기정과 더불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던 거의 유일한 선수였다. 옛 기록을 찾아보면 그는 말 그대로 종목을 가리지 않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것 같다. 그는 배재학당과 연희전문 시절 축구와 육상 선수로도 여러 대회에 출전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1928년 6월8일, 그는 경성운동장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수립한다. 경성운동장 최초의 홈런 주인공이 된 것이다. 1928년 6월10일치 는 2면에서 “경성구장 설립 이래 초유의 대 본루타, 연전 이영민군이 담을 넘겨”(본루타가 무슨 뜻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홈런이었다)라는 제목과 함께 그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싣고 있다. “그동안 동 구장에서 행한 경기에 출장한 인물에는 미국의 거인군이며 (중략) 일본의 제강군들이 개설 이래 4년간에 들고 낫스나 재작 8일에 연전군이 대 의전(경성의전) 야구전에 삼번타자 이영민군이 제1회 2사후 제2구 인코너를 스코어판을 념겨 (중략) 본루에서 370척을 거리한 판을 넘어 낙구했다.” 설립 당시 홈에서 좌우 펜스까지 거리는 108m, 중간 펜스까지의 거리는 111.6m였다. 그는 193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사 주최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일본 순회 경기엔 ‘조선의 대표선수’로 출전할 기회를 얻기도 했는데, 이때 베이브 루스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54년 8월12일, 그는 아들의 친구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해방된 조국에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해방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운동장은 경기장이 아닌 대규모 군중이 모여드는 집회 장소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3상 회담으로 촉발된 찬탁과 반탁 논란 집회와, 1946년 노동절 집회, 좌절과 회한 속에서 숨진 몽양 여운형(1886~1947)과 백범 김구(1976~49)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열렸다(1926년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가 열렸다). 몽양의 오랜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1892~1954)의 아들 조윤구(65)씨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몽양 선생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신당동 집을 나서던 기억이 선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혼란기에는 대규모 집회 장소
분단 이후 가난한 나라 백성들의 시름을 달래준 것은 스포츠 경기였다. 그 시절 운동장의 형편은 더할 나위 없이 나빴다. 스코어보드는 관중석 뒤쪽에 세워진 칠판이었고 조명탑이 없어 밤에는 경기를 열지 못했다(꼭 필요할 때는 군부대 지프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조명탑 역할을 했다). 서울운동장은 1960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잔디구장인 효창운동장에 축구 메카의 자리를 내주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효창구장이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는 혹사 끝에 개장 4년 만에 맨땅으로 변하자, 축구의 중심은 다시 서울운동장으로 돌아왔다. 이를 반기듯 운동장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2만5천 석의 스탠드를 갖췄고, 1968년에는 운동장 최대 숙원사업이던 조명탑과 전광판이 설치됐다. 그때 서울 인구는 380만 명, 소설가 이호철은 그해 2월부터 에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은 연재하기 시작했다.
올드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은 서울운동장 최대의 ‘로망’은 박스컵(나중에 대통령배 축구대회와 코리아컵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9년 폐지됐다)일 것이다. 그 시절 ‘태극호’는 말레이시아, 타이 등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아시아의 2류 팀이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을 텔레비전 앞에 불러모은 3대 대회는 월드컵, 유럽축구선수권, 챔피언스리그가 아닌,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타이의 킹스컵, 그리고 우리나라의 박스컵이었다.
1976년 9월1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박스컵 개막전에서 우리는 나중에 ‘차붐’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스타의 탄생을 지켜보게 된다. 당시 ‘태극호’는 원정길에 나선 메르데카컵 개막전에서 홈팀 말레이시아에 1-2로 참패한다. 절치부심 이를 간 대표팀은 말레이시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설욕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태극호는 전반에만 내리 세 골을 내주는 졸전을 펼쳤고, 후반 들어 종료 7분을 남기기까지 한 골씩을 주고받아 1-4로 뒤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시아의 영웅 차범근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센터 서클에 볼을 놓고 툭 밀어주는 것을 몇 번 치다가 슛을 때렸는데, 그게 골인이 됐다. 나중에 들어간 두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대한축구협회 엮음) 그는 7분 동안 내리 3골을 몰아 넣으며 극적인 무승부를 일궈냈다. 당시 녹화 필름은 남아 있지 않아, 차범근이 엮어낸 7분의 기적은 올드팬들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사이 이웃한 야구장에선 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고교야구 스타들이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며 명멸했다. 고교야구의 마지막 불꽃은 최강 선린상고를 이끌던 두 기둥인 박노준·김건우가 줄줄이 부상으로 탈락한 채 경북고에 4-6의 패배를 당하던 1981년 8월26일 봉황대기 결승이다. 이듬해 프로야구와 그 이듬해 프로축구의 개막전이 열렸던 곳도 이곳 서울운동장이다.
문화연대, 반대 기자회견 열기로
‘대망의 80년대’가 밝아왔고, 운동장은 퇴물로 전락하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대비해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에 맞게 기능도 크게 축소됐다. LG와 OB의 ‘서울 더비’나 국가대표팀의 A매치는 더 이상 동대문을 찾지 않는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렸던 프로 경기는 2000년 10월22일 오후 3시15분에 열린 성남-수원의 ‘2000 아디다스컵’ 결승전으로, 날쌘돌이 서정원의 결승골로 수원이 성남을 1-0으로 이겼다. 아직 남아 있는 야구장에서는 2005년 189 차례 경기가 열려 9만6494명의 관객이 입장했다.
수명을 다한 동대문의 축구장과 야구장은 경기장을 허물어야 하는 서울시와 그 안에 깃든 노점상의 갈등의 배경으로 역사에 마지막 이름 한 줄을 걸칠 것이다. 문화연대는 10월31일께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정신적 토대가 된 운동장을 함부로 허물면 안 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연다. 경기장이 없어져도 삶은 계속된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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