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아버지 따라 장남과 두 딸이 모두 마술사인 황찬길씨네… 모든 세대 만족시키는 눈높이 공연… 마술은 사랑의 만병통치약
▣ 안양=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 가족, 흰 비둘기를 다루는 손놀림부터 예사롭지 않다. 어머니가 비둘기가 들어 있는 새장을, 막내딸은 비둘기를 손에 들고 나타나더니 아버지는 옆에서 잠시 뒤돌아 서 있다가 빨간색 보자기에서 비둘기를 뚝딱 만들어낸다. 어머니 손가락에 앉아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덕대면서 탈출을 시도하자 막내딸이 한마디 한다.
“저 비둘기는 요즘 훈련을 받는 중이라서 아직 좀 부족해요.”(웃음) 가족 모두가 천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내고 아무것도 없던 손에서 공을 뚝딱 만들어내고 사람도 허공에 띄우는 이 가족, 어린이 드라마 의 한 장면이 아니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동에서 마술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황찬길(71)씨 가족 얘기다.
따로 또 같이 1년에 150회 공연
먼저 간단히 가족 소개를 하면, ‘운고’(雲苦) 화백으로 더 유명한 아버지 황찬길씨는 그림과 마술, 노래까지 섭렵한 종합예술인이다. 큰아들 휘(30)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한 목포 동아인제대학교 마술학과 교수. 유치원 교사인 큰딸 휘정(28)씨는 유치원에서 마술을 어린이 교육에 접목시킨 마술과학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막내딸 휘숙(24)씨는 미술 공부를 하다가 지금은 공연예술경영 공부를 하며 틈틈이 마술을 가르치는 마술 선생님이다. 아버지와 삼남매는 따로 또 같이 1년에 150회에 달하는 마술 공연을 하고 있다. 어머니 이정숙(53)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족들의 마술 공연 매니저로 휴대전화가 쉴 틈이 없다.
가족이 모두 프로 마술사인 황씨 가족의 마술 공연은 마술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술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분위기만큼은 어떤 마술사의 공연보다 유쾌하다. 휘숙씨는 들뜬 목소리로 공연 분위기를 전했다. “저희 가족 공연은 보시는 분들이 더 재미있어해요. 제가 먼저 나가서 마술을 보여드리다가 ‘저의 아버지입니다’ 하면 관객들의 눈이 동그래져요. 아버지 다음에 언니, 오빠까지 나오면 마술에 쏙 빠져들죠. 아버지는 50대 이상 중장년층 관객과 눈을 맞추고 유치원 선생님인 언니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줘요. 오빠랑 저는 20~30대를 책임지죠. 어떤 가족이 관객으로 오더라도 다 즐겁게 해드릴 수 있어요.”
이 가족에게 마술이 찾아온 것은 30여 년 전, 황찬길씨가 복역 생활을 마치고 1975년 출소한 뒤 교도소 재소자 위문공연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황씨는 한국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했다가 탈영해 19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교도소에서 배운 그림실력으로 사회에 나와 화가로 이름을 알린 황씨는 예전 자신과 같은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공연에 열정을 쏟았다. 황씨는 “한번은 영등포 교도소로 위문공연을 갔는데, 그 공연에 초청된 마술사의 무대를 너무 좋아하며 즐기는 재소자들을 보고 마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마술사들을 쫓아다니며 마술을 익힌 황씨는 이후 교도소 위문공연과 노인정 봉사공연 등 수많은 공연 무대에서 마술을 선보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공연을 찾아다녔던 삼남매가 마술은 물론 춤과 노래까지 잘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휘숙씨는 “항상 아버지는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다니며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시험 기간에는 아버지가 학교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시험이 끝나면 데리고 봉사공연을 가곤 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어머니 이씨가 꺼낸 옛날 사진에는 무대 위에서 한복을 입고 춤추는 삼남매의 앳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술공연이 가족여행 되더라
황씨 가족에게 마술은 일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항상 함께 마술을 연습했고 마술 얘기를 했다. 휘씨는 “가족 마술 공연에서는 눈빛만 보면 알아요. 가족이자 동료이니까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다 보니 가족여행으로 다녀오지 않은 곳이 없어요. 마술 공연이 곧 가족여행이었죠”라고 말했다. 아무리 애틋해도 사람이니까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도 마술은 만병통치약이었다. “무대 뒤에서 언니랑 싸우다가도 무대 위에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실방실 웃으며 공연을 해요. 공연을 끝내고 내려오면 또 언제 싸웠냐는 듯이 잘 놀았죠. 머리가 좀 커진 다음에는 주말에 봉사공연 가는 게 싫은 날도 많아서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또 공연에 다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좋고 뿌듯해져요.” 휘숙씨의 설명이다.
그러면 가족 중에 누가 마술을 가장 잘할까? 삼남매는 모두 ‘아버지’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마술 경력으로 보나 무대매너로 보나 아버지의 마술에는 노련미가 있다. 그럼 삼남매 중에는? 큰아들 휘씨는 아버지를 빼닮아 마술 손놀림과 기술이 가장 뛰어나다. 큰딸 휘정씨는 말솜씨가 가장 좋다는 평.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재치 있는 말투로 진행하는 데 재능이 있다. 막내딸 휘숙씨는 오빠의 장점과 언니의 장점을 반반씩 갖추고 있다.
2003년 안양에 마술소극장을 열고 주도적으로 공연을 해나가고 있는 삼남매의 앞날에 마술이 빠질 수 없다. 휘씨는 마술 퍼포먼스에, 휘정씨는 어린이 과학마술에, 휘숙씨는 마술경영과 마술교육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 독립적인 마술 활동을 하면서 또 가족 마술 공연도 병행해나갈 예정이다.
황씨 가족의 애정행각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술을 모르면 이 집에 시집장가 오기도 힘들지 않을까?’ 삼남매 중 배우자를 맞은 사람은 아직 휘정씨뿐이다. 휘정씨 남편도 마술을 좋아한다. 휘정씨와 남편의 연애와 결혼에는 마술이 큰 역할을 했다. “남자만 마술로 호감 사라는 법 있나요? 여자들도 마술로 남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어요.” 휘씨와 휘숙씨도 마술을 좋아하는 배우자를 맞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또 삼남매 모두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그랬듯이 마술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어머니 이씨는 마술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휘숙씨에게 마술을 배우는 아이 중 자폐를 앓는 아이가 있다. 엄마 손을 잡고 휘숙씨에게 마술을 배우러 오면서 이 아이는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봐도 못 본 척했지만 지금은 인사도 꾸벅 한다. 마술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얘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이의 자폐증세로 우울하기만 하던 집안 분위기는 아이가 집에서 가족에게 마술을 보여주면서 조금씩 밝아졌다. “이제 아이의 마술 강습이 끝나면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러 와요. 저희 공연에도 가족이 함께 보러 오곤 하죠. 마술이 집안에 웃음을 되찾아준 거예요. 참 신기하지 않아요?”
서먹할 때 분위기 푸는 비법
가족은 늘 함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애써 말을 꺼내려 하지 않는다. 식탁에서 저녁을 먹다가 느닷없이 가족에게 “요즘 어때? 고민은 없어?”라고 물으면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하는 타박만 돌아올 뿐이다. 이럴 때 마술이 있다. 이번 한가위,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오랜만에 만나 데면데면하고 마땅히 할 말도 없다면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슬쩍 쉬운 마술을 하나 해보는 건 어떨까. “어머, 신기하다! 나도 가르쳐줘!” 하며 모여들고 또 서로 웃고 떠드는 것, 그것이 황씨 가족이 보여준 진짜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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