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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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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족 사나이의 사랑과 투쟁

등록 2006-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가스전 공사 둘러싼 밀림의 인권 유린 고발해온 ‘거인 사냥꾼’ 카사와…“대우인터내셔널 등이 계속 참여한다면 버마 군부독재 위해 한몫하는 셈”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그는 끝내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카사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예닐곱 개나 되는 그의 가명 가운데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이다. 카사와는 버마의 카렌족 말로 ‘흰 코끼리’란 뜻이다. 영험한 동물인 흰 코끼리는 민중을 위하는 힘센 이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를 ‘거인 사냥꾼’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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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인생이 뒤바뀌고…

그는 어려서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대학에 가 경영학을 공부해 남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17살 철없던 시절엔 미국산 ‘리’ 청바지를 사입고, 한쪽 귀에 귀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게 멋있다고, 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1988년 7월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을 뒤바꿔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 정보기관에 체포된 그는 사흘 밤낮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기관원들은 군부에 맞서 싸우다 잠적한 친구의 은식처를 말하라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의 육신을 괴롭혔다. 그는 “그때 만약 알고 있는 게 있었다면 다 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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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줄 았았는데 살아났고, 용케 곧 풀려났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이미 저만치 사라진 뒤였다.

석방된 카사와가 불붙기 시작한 학생 시위에 가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위에 참가해 고문피해를 증언했고, 조직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의 봄이 온 것만 같았지만, 파국은 쉽게 다가왔다. 시위 진압에 나선 군부는 무차별 ‘사냥’을 벌였고, 총격을 입은 부상자들은 사망자와 함께 생매장해버리기까지 했다. 타이-버마 국경지대 밀림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잠시 은신해 있던 마을로 2주 만에 그를 찾아온 어머니는 “이미 군인들이 와서 네 친구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밀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수많은 참상을 보고 들었다. 가슴을 도려낸 20대 초반 앳된 여성의 주검이 알몸인 채로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장면을 목격했을 땐 차라리 서글펐다. 복수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만행의 기록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총을 내줬지만, 그는 펜과 녹음기를 들고 밀림 깊숙이 들어갔다. 국경마을 짜우찌 등지를 돌며 군부에 의한 인권유린 증언을 모으기 시작했고, 조사결과는 영문자료로 만들어 국제 인권단체에 보냈다.

어려움도 있었다. 1993년 함께 활동하던 헌신적인 동료 한 명이 군부에 체포됐다. 군인들은 그를 사흘간 나무에 묶어놓고 몸에 칼집을 낸 뒤 상처 부위에 매운 것을 뿌렸다. 그리고 “저항하면 너희도 저렇게 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을 위협했다. 동료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그 무렵 한 세계적인 인권단체 현지 사무소를 방문했다. 그런데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집한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놓은 보고서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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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 케이티와의 운명적 만남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이 그를 찾아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법대생 케이티 레드포드였다. 케이티는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버마 군부의 인권유린 실태에 대해 알고 싶으면 당신을 찾으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카사와와 케이티는 조그만 배를 빌려타고 강을 거슬러 밀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숨어 사는 난민들의 증언을 채록하기 시작했다.

“그때 케이티는 군부의 대규모 벌목으로 인한 인권침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군부는 수입의 60%가량은 야다나 가스전 사업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벌목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야다나 가스전 사업은 거대 정유업체인 프랑스의 토탈과 미국의 유노컬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했다. 이들 업체는 개발한 가스를 타이에 판매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건설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버마 군부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이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또 파이프라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원된 군부대는 마을 주민을 상대로 무차별 폭력과 성폭행 등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 여름 밀림을 뚫고 인권유린 증언 수집에 열중하던 케이티는 결국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는 그에게 카사와는 잠바와 침낭을 빌려주고 정성껏 간호했다. “케이티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투쟁과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밀림 한가운데서 내 생일을 맞게 됐다. 당시 밀림에선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지만, 생일에는 음주가 허용됐다. 그날 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떴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케이티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연인이 된 뒤 케이티는 카사와에게 “처음 봤을 때부터 ‘눈부시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고 수줍은 고백을 했다.

1995년 카사와와 케이티, 그리고 케이티의 법대 동기생 타일러 지애니니는 ‘얼스라이츠 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신생 단체는 야심찬 꿈을 갖고 출발했다. 야다나 가스전 공사를 둘러싼 군부의 인권유린을 묵인·방조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본 유노컬을 미국 법정에 고소하기로 한 것이다. 전쟁영화로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부근 깐짜나부리를 중심으로 파이프라인 건설에 따른 인권유린 피해자를 탐문해나갔다. 무너진 육신을 버티며 살아남기 위해 땀이라도 핥아야 했던 강제노역의 아픔과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이 손녀를 성폭행하는 걸 막지 못해 울부짖는 할머니의 비통한 증언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1996년 6월께 소송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됐고, 1997년 초 50명의 버마인이 ‘무명의 원고’가 돼 유노컬을 상대로 한 ‘무모한’ 소송이 미국에서 시작됐다.

다국적기업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다

지루한 법정공방이 오고 간 지 8년여 만인 지난해 봄, 법원의 불리한 판결을 우려한 유노컬 쪽은 법정 밖에서 원고 쪽과 합의를 했다. 보상금의 액수는 합의조건에 따라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수백만달러에 이른다는 게 대체적인 추정이다. 이어 프랑스의 토탈도 비슷한 형태의 합의를 제의해왔다. 카사와와 그의 동료들은 공익위원회를 구성해 확보한 보상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한편, 파이프라인 건설공사 현장 주변 주민들에게 장기적인 교육·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케이티와 결혼한 뒤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가정을 꾸렸지만, 카사와는 인권활동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등 지금도 1년에 너댓 달은 타이-버마 국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또 싸움의 무대를 에콰도르와 페루 등 남미로 넓혀가기 위한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부패한 정권과 다국적 기업이 결탁한 곳이라면 전세계 어디에서든 인권침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지난 5월14일 폐막된 제10회 인권영화제에선 카사와의 가스 파이프라인 투쟁을 다룬 이탈리아 출신 밀레나 카네바 감독의 다큐멘터리 <책임회피>가 상영됐다. 이번이 두 번째인 그의 한국 방문에는 영화제 홍보 외에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 등이 참여한 다국적 컨소시엄이 버마 서부 아라카 지역 앞바다 ‘슈에 가스전’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슈에 가스전은 2010년부터 본격 개발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는데, 시추한 가스를 중국이나 인도로 수출하기 위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예정이다.

“파이프라인 건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군부에 의한 인권유린이 자행될 것”이란 게 카사와의 지적이다. 그는 “유노컬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 업체들도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이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며 “민주화 투쟁 경험이 많은 한국의 친구들이 군부독재에 고통받고 있는 버마 민중을 위해 이를 막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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