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에 의해 ‘강제전향’한 장기수들, 그들을 고향에 보내선 안될 이유가 있는가

“당신들은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욕심이라뇨?”
“정부에서는 더이상 보낼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 북쪽에서는 남쪽으로 한명도 보내지 않는데….”
2월7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한백의 집’에 기거하는 박종린(69)씨는 편지를 건네주려 왔다가 박씨가 장기수 출신임을 확인한 집배원의 따지는 듯한 반응에 당황했다. 박씨를 포함해 장기수 33명이 전날(2월6일) 전향 무효선언과 함께 북송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것을 집배원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있는 듯했다. 박씨는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1시간 남짓 자신의 사연을 들려줬다.
“그 살인적 전향공작을 인정할 수 없다”
2월8일 오후 취재진을 만난 박씨는 “내 사연을 자세히 들은 집배원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짓더라”며 “남쪽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만난 집배원처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박씨는 북송이 언제 이뤄지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우리들의 존재를 우리 사회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우리를 두고 전향자이기 때문에 북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1970년대 이후 저지른 살인적인 전향공작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태도입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분류하는 1970년대 이후 ‘전향자’ 가운데 폭력적인 전향공작의 결과로 전향자로 분류된 이들은 전향자라고 볼 수 없어요.”
지난해 정부는 장기수 북송과정에서 송환 기준을 ‘전향 여부’로 삼았다. 공개적인 전향 취소선언 뒤 송환을 희망했던 정순택씨와 정순덕씨의 송환이 실현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분류법에 의해 ‘전향 장기수’로 낙인찍혀 있는 이들 대부분이 “살인적 폭력의 결과로 빚어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전향’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하며 ‘강제전향’이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강조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살던 박씨는 1959년 5월 정치공작원으로 남쪽에 내려왔다가 붙잡힌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3년 출소할 때까지 꼬박 35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전향을 하려 했다면 그 이전이라도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텐데 35년이나 구금됐던 그에게 ‘전향’ 딱지가 붙은 이유는 뭘까.
“1993년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장기수를 내보내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향서를 쓰면 나갈 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신앙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 체제를 인정할 수는 없다’면서 버텼습니다. 그때 자주 찾아오는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와 자매결연한 상태였습니다. 내가 전향서를 쓰지 않는 대신 목사님이 보증하는 형식으로 해서 석방됐습니다.”
이로써 박씨는 전향 장기수로 분류돼 지난해 북송 신청대상자에서 빠졌다. 박씨는 남쪽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다. 부인과 아들, 딸 등 가족들 모두 현재 북쪽에 생존해 있다.
김영식(68)씨 역시 강제전향 장기수다. 그는 1월29일 전북종교인협의회(회장 한상렬 목사)가 연 ‘강제전향 양심선언 및 송환촉구’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사상전향은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김씨는 북쪽에서 태어나 1962년 공작원 안내선 선원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돼 1964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6년 동안 복역했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김씨는 1973년 10월부터 두달 동안에 걸친 전향고문에 못 이겨 전향서에 날인했다. 그는 당시 ‘전향공작전담반’에서 일했던 8명의 실명을 그대로 외우고 있을 만큼 구체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전향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는 한평도 안 되는 공간에 열명도 넘는 사람을 집어넣더라구. 숨도 못 쉬게 하는 거야. 그러더니 ‘떡방’이라고 불리는 흉악범죄 출신의 재소자들을 시켜서 한명씩 내어놓고 때리는 거야. 한겨울에 발가벗겨서 찬물 끼얹고, 원산폭격시키고, 손을 뒤로 묶어서 거기다 끈을 매달고 계속 잡아당기고…. 말도 말아. 그러면서 계속 그러는 거야.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 만난다는 말 한마디가 전향한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다른 모든 고문은 참을 만한데 물고문만큼은 정말로 못 견디겠더라고. 고문틀에 눕혀놓고 밧줄로 감고 두손을 뒤로 해서 수갑을 채우고 목에는 나무막대기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에 천으로 입과 코를 완전히 덮어씌운 채 고춧가루를 담은 물을 천천히 계속 뿌리는 거여.”
그가 당시 복역하던 교도소는 장기수들 사이에서조차 ‘지옥’으로 불릴 만큼 고문의 강도가 심했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던지 전향을 거부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한계상황에서 더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박종린씨는 “쉽게 말하면 똑같이 당했는데 어떤 놈이 (고문을)담당했느냐에 따라 지금 북에 가 있는 장기수들도 있고 남쪽에 남아 있기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기수 5명 의문사, 진실 드러날까

이와 관련해 지난 1월20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는 박융서(1974년·대전), 손윤균(1976년·대구), 최석기(1980년·대전), 변형만·김용성(1980년·당시 청송보호감호소)씨 등 장기수 5명의 옥중 의문사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은폐돼온 진실이 드디어 빛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김씨는 출소한 지 13년이 흘렀지만 아직 남쪽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그야말로 막노동만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새벽부터 온종일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푼푼히 모은 그의 돈을 탐내는 일부 남쪽 사람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건없이 남을 돕는 순수한 그의 마음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가족들이 모두 북쪽에 있어 이곳에서는 정붙일 만한 구석이 없는 셈이다.
강제전향 장기수들은 몸고생에 마음고생까지 겹치는 이중고를 겪어왔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권오헌 공동상임대표는 “이들은 전향자라는 이유로 보안관찰법 등을 통해 당국으로부터도 오히려 더 많은 통제와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며 “어찌 보면 소외감 속에서 더욱 멸시를 당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동료들은 견뎌낸 고문을 나는 왜 견뎌내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과 자책감으로 인해 비전향 장기수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에 따르면, 전향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의 독립투쟁을 막기 위해 만든 ‘사법당국통첩’에서 확립된 개념으로, 한 인간의 믿음이나 소망이나 느낌을 폭력적인 흑백논리로 분류해 버리는 비인간화의 체계이며 인간의 긍지를 파괴하는 체계다.
인민군 포로 출신도 북송해줘야

‘양심의 자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향제도의 비인간성은 장기수 문제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1980년 군사정권 당시 동료를 밀고하도록 만들었던 ‘녹화사업’ 피해자들이나, 최근 전향제도를 대체했다는 ‘준법서약제’에 따라 서약서를 쓰고 석방된 시국사범들이 출소 뒤 괴로워하는 모습 등에서 여전히 그 폐해를 확인할 수 있다.
장기구금양심수들의 쉼터인 ‘통일광장’(서울시 인사동) 대표 권낙기씨는 “강제전향 장기수와 함께 지난해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과 생이별해 이산가족이 된 남쪽 가족들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도 북송되는 것이 마땅하다”며 “한국전쟁 이후 산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붙잡힌 이른바 빨치산 출신으로 1970년 초에 출소한 인민군 포로 출신자들의 북송 요구에 대해서도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6일 기자회견이 끝난 뒤 김영식씨는 장기수 동료들의 손을 잡고 “이제야 인간이 된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치적 생명을 생물학적 생명보다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동원해 생명줄을 강제로 끊어놓으려 한 국가가 진실로 반성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사형’ 훈장으로 여길 것”…서울대 로스쿨 교수 경고

골든글로브 거머쥔 ‘케데헌’…이재 “거절은 새 방향 열어주는 기회”

국세청, 체납자 1조4천억 ‘면제’…못 걷은 세금 줄이려 꼼수

“임무 완수, 멋지지 않나”…김용현 변호인, 윤석열 구형 연기 자화자찬

미국 연방검찰, 연준 의장 강제수사…파월 “전례 없는 위협”
![[단독] ‘검찰도 내사 착수’ 알게 된 김병기, 보좌관 폰까지 “싹 다 교체 지시” [단독] ‘검찰도 내사 착수’ 알게 된 김병기, 보좌관 폰까지 “싹 다 교체 지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111/53_17681320293875_20260111502187.jpg)
[단독] ‘검찰도 내사 착수’ 알게 된 김병기, 보좌관 폰까지 “싹 다 교체 지시”

차익 40억 이혜훈 ‘장남 위장미혼’ 부정청약 의혹으로 고발당해

‘침대 변론’ 김용현 변호인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 칭찬해줘”

관세로 장사 망치고, 공무원들은 내쫓겨…‘일상’ 빼앗긴 1년
![바이야이야~ [그림판] 바이야이야~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6/0111/20260111502099.jpg)
바이야이야~ [그림판]

![[단독] 서울시가 세운3-2·3구역 용적률 올리자, 한호건설 예상수익 1600억→5200억원 [단독] 서울시가 세운3-2·3구역 용적률 올리자, 한호건설 예상수익 1600억→5200억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6/0109/53_17679679801823_20260108503886.jpg)
![마침내 극우에 표 던진, 공장노동자 내 어머니 [21이 추천하는 새 책] 마침내 극우에 표 던진, 공장노동자 내 어머니 [21이 추천하는 새 책]](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6/0102/2026010250210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