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5년의 연륜을 쌓은 한국천주교의 환경운동 ‘하늘 땅 물 벗’
평신도 여성 수백명과 함께 ‘도·농생명공동체 살리기’에 앞장서 뛴다
▣ 김재희 <이프> 편집인 franzis@hanmail.net
지난 3월6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상지회관 베네딕트 수녀원 성당에서는 우리농 가족의 날 대의원총회가 열렸다. 서울 시내 천주교회의 유기농 매장을 운영하는 활동가와 생활공동체협동조합 회원 대부분은 여성이다. 이날 총회 개막 전 오전에는 ‘여성과 생명’이라는 주제로 김지하 시인의 생각마당이, 오후의 문화마당에는 이영란 경희대 교수가 이끄는 힐데가르트 제례가 진행됐다.
본당 활동가들의 열정과 성실함
광고
“전세계 가톨릭 여성이여, 단결하라!” 도발적으로 들리지만 내용은 좀 시답잖은, 10년 전 독일어권에서 출간된 에스터 빌라의 책 제목이다. ‘잠자는 산’ 같은 가톨릭 여성들이 모두 일어나 함께 눈뜨면 공산혁명보다 더 큰 불길이 일어날 거다, 200년 정도 시계가 늦게 가는 바티칸 성직자 어르신들은 현대 사회의 복잡 다양한 문제를 정면으로 볼 능력이 부족하니 성령의 불길에 몸을 맡긴 초대 교회 여성들처럼 새로운 시대를 예감한 가톨릭 여성들이 (전 지구적 규모로) 교회개혁에 앞장서라는 선동적 내용의 책이었다.
그녀의 호소에 공감해 곧장 바티칸으로 달려가 ‘우리가 교회’라며, 그 소명을 인정하고 부디 그 책무를 나누자는 극성스런 무리도 있었지만, 한국 천주교와는 무관한 흐름이었다. 한결 완고하고 온순해 뵈는 한국의 가톨릭 여성, 그러나 생명운동의 기치 아래 그녀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하게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일에 솔선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종말론이 19세기 한반도 전역에 횡행했을 때 “종말이 아니라 새 시작이다, 수천 년 사무친 여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닿아 드디어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후천개벽이 코앞에 왔다”고 동학의 옛 스승들은 선언했다. “부인의 도통이 시급하다, 인류문명의 전환 혹은 구원의 길은 음개벽”이라는 해월의 말을 인용하며, 김지하 시인은 이날 강연에서 “생명을 잉태하며 생명을 지키는 능력이 한 수 위인 여성들이 인류문명이 벼랑 끝에 몰린 절체절명의 전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는 생명운동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동아시아 사상, 그중에서도 19세기 한반도에서 싹튼 귀중한 생명사상에 진지하게 귀기울이고 상호 융합을 시도하는 일은 말 그대로 ‘보편적인 종교’인 가톨릭에 한국 교회가 기여해야 할 몫이 아니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광고
생명과 평화에 대한 동아시아 전통의 우주적 전망과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성찰을 유연하게 통합해보자는 원대한 비전은 ‘보통 아줌마’ 입장에선 조금 알아듣기 힘들었고, 더욱이 ‘겸손과 순명의 덕’에 길들여진 교회 여성들의 감성과는 그다지 코드가 맞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대를 대변했던 양심, 시대를 앞선 생명사상가를 면전에서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경험 자체로 큰 힘을 얻었다는 반응이다.
한국천주교는 12년 전인 1994년 봄 주교회의에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결의했고, 활동의 명실상부한 주역으로 본당 활동가, 즉 평신도 여성 수백 명이 ‘도·농생명공동체 함께 살리기’에 앞장서 뛰고 있다.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힘을 합해 환경보전형 지역농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도·농 생활실천운동의 모범을 만들어낸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다. 어느덧 15년의 연륜을 쌓은 한국천주교의 환경운동 ‘하늘 땅 물 벗’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짬밥’을 먹은 활동가들도 꾸준하게 증가하는 추세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조대현 신부는 “본당 활동가 여성들의 열정과 성실함은 어떤 환경단체에도 뒤지지 않고 활동의 잠재력은 무한하지만, 환경운동과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훨훨 타오르게 할 만큼 그 불씨가 제대로 지펴지지는 않았다”고 진단했다.
힐데가르트가 가르쳐준 노래와 기도
광고
환경사목위원회는 그 ‘불씨’를 지피기 위해 생명운동 전반의 각론을 다루는 ‘하늘 땅 물 벗’ 교육과정을 개설해 본당의 활동가를 양성하고 지역별로 필요한 활동을 벌이도록 지원한다. 김현정 환경사목위원회 조직국장은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원칙을 따르는 자율적 사고와 리더십을 보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능력의 보강은, 교회에서는 ‘보조(subsidiarity)의 원칙’을 실현하는 기틀이기도 하다. 보조의 원칙은, 민초들의 자율적 결정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아래에서 결정해야 하며, 혹시라도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 바로 그 윗단계에서 결정을 보조하라는 가톨릭 교회의 원칙이다.
이날 오후 문화행사는 이영란 교수의 연출에 따라 힐데가르트가 가르쳐준 노래와 기도에 온몸을 맡기면서 시작됐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접어두고 쓰지 않던) 날개를 펼치리라, 지구 어머니를 학대하고 겁탈하는 일을 다신 용납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생태영성 제례로 이어지며 절정에 올랐다. 12세기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의 삶은 대자연과 소통하며 땅의 지혜를 몸으로 깨닫는, 요즘 말로 ‘참살이의 원형’이었다. 활동가들은 이 행사에서 생명의 수레바퀴를 함께 돌리며 환경운동의 잔다르크, 힐데가르트 성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숨결에 몸을 실었다.
![]() | ||||
![]() | 개방 홍수 시대의 노아 방주 |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던 명동성당 나들목에 유기농 매장 ‘하늘 땅 물 벗’이 문을 열었다. 금싸라기 땅 한복판, 채산이 맞을 리 없는 가게를 연 이유는 명백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후원으로 문을 연 가게 정면에는 ‘내 아버지는 농부’라는 성서 구절이 선언처럼 박혀 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로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창립된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본부가 그동안 쌓아온 역량을 새로운 비전으로 펼쳐 보이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개발도상국 수도의 심장이었던 명동 한복판에서, 애써 소박함을 지향하는 자연친화적 디자인만이라도 번화하나 볼썽사나운 도시의 천박하고 난폭한 도시중심주의와 개발지상주의에 항거하는 “생태주의자의 전위적 몸짓”으로 읽히길 소망한다고, 가게 인테리어를 디자인한 김명진 교수(삼성디자인학교)는 덧붙였다.
이 가게는 “도시와 농촌의 유기적 연결뿐만 아니라 해체되는 농촌과 공동체 문화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조대현 신부는 강조했다. 민주화 투쟁의 성지에서 화해와 상생의 교두보로 거듭나는 명동성당과 ‘하늘 땅 물 벗’ 매장은 지속 가능한 경제 시스템 개발과 실험이라는 거창한 꿈을 안고, 농산물시장 개방의 매서운 파도를 헤치며 고된 항해를 시작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다.
‘하늘 땅 물 벗’ 상설 매장은 명동 말고도 서울 전역에 16개가 더 있다. 이 밖에 주말 장터 형식으로 열리는 41개 본당 안 가게들은 가톨릭 환경운동의 생명줄로, 우리 농촌과 환경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여성 신자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된다. 에스터 빌라의 말대로 “그녀들이 모두 깨어 일어나면” 천성산이며 새만금 같은 어리석은 음모는 더 이상 통하지도, 발붙일 곳도 없을 것이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보령머드 ‘장인’의 5천원 뚝배기…“다이소 납품, 남는 건 인건비뿐”
헌재, 5 대 3 선고 못 하는 이유…‘이진숙 판례’에 적시
마은혁 불임명 ‘위헌’ 판단한 헌재…‘8 대 0’ 외 다른 길 있나?
“저희 엄마 가게 도와주세요” 1억 조회수…자영업 구하러 효심이 나섰다
입만 열면 ‘법치주의’ 한덕수·최상목…“직무유기죄 처벌해야”
‘헌재 비난’ 안창호 “탄핵 선고 존중” 돌변에…“사과부터 하라” 비판
‘만에 하나’ 한덕수, 대선일 공고 뭉개면? “헌재가 막을 수 있다”
김은숙 작가 “헌재, 거기 괜찮아요? ‘시그널’ 무전기로 물어보고파”
강원서도 “윤석열 파면만이 민주주의·경제회복의 시작”
“반국가세력 언론인으로 척결되겠구나, 두려웠다”…‘707에 포박’ 기자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