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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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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산의 길 끝에 두 남자가 있었네

등록 2006-01-05 00:00 수정 2020-05-03 04:24

지리산 노고단과 천왕봉을 20년 넘게 지켜온 산장지기를 만나러 가는 길
산을 무서워하지 않는 등산객에 시달리며, 고독할 때는 살아숨쉬는 능선을 보며…

▣ 임미려/ 환경전문 자유기고가

백두대간의 정점이자 남한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의 두 축인 노고단과 천왕봉을 20년 넘게 지키며 살아온 두 산사람을 보러 간 것은 12월22일 아침이었다. 구례구역에 내려 화엄사 지리산 남부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밤새 내린 눈은 다행히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입산 통제는 풀려 있었다. 구례구 성삼재를 출발해 노고단·벽소령·천왕봉·치밭목으로 이어지는 종주길에 올랐다.

노고단의 원래 이름은 길상봉이다. 노고단의 높이는 1507m. 천왕봉(1915m), 반야봉(1734m)과 함께 지리산 3대 봉 가운데 하나다. 노고단 정상 아래 1400m 고지에 위치한 노고단 대피소는 계절의 앞자락을 구경할 수 있는 신기한 장소다. 정상과 아래의 온도가 7~9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아래서 반팔을 입고도 땀을 흘려도 대피소 근처에서는 추워서 몸을 떨게 마련이다.

노고단의 설경은 지리산의 ‘11경’

성삼재에서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노고단 대피소는 200여 명을 수용한다. 1970년 이전 이곳은 허름한 움막집 모양의 대피소였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건 1988년. 산장의 안마당에 접어들자 노고단 대피소 관리인 김순환(50)씨가 반갑게 취재진을 맞는다. 전라남도 구례 출신인 그를 산으로 이끈 건 지리산 산장지기의 산증인인 피아골 산장의 함태식(73)씨다. 김씨의 아버지와 함씨가 친구였던 인연으로 김씨는 76년 12월 지금의 노고단 제2대피소의 산지기로 들어왔다. 1988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관리 체제에 들어가면서 그도 90년 공단 직원이 됐다. 그는 30년 산 생활의 4분의 3을 이곳에서 보냈다.

어제까지 입산 통제였던 탓에 산장은 한가했다. 오랜 산 생활에 사람이 그립거나 외롭지는 않을까. “산을 안 좋아했으면 천만금을 줘도 못 사는 곳이죠. 조금이라도 속세에 미련이 있다면 벌써 이곳 생활을 접었을 겁니다.” 남들은 지루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축복받은 이 땅에서 계절별로 달라지는 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든단다.

노고단의 사계절이 모두 절경이지만, 그중에서도 눈 내리는 겨울은 노고단의 참모습인지 모른다. “피아골의 단풍, 천왕봉 일출 등 지리산에는 10경이 있죠. 하지만 사실 숨겨진 1경이 따로 있어요. 바로 노고단의 설경입니다.” 눈과 바람이 만들어낸 산 속의 산호초, 빽빽이 들어선 나무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핀 눈꽃의 모습이 펼쳐진 노고단 언덕은 무아지경의 공간이다.

“안전불감증에 걸린 자살특공대”

최근 몇 년 동안 연간 70만~80만 명의 탐방객이 이곳 대피소를 방문했다. 70년대엔 기껏해야 2만5천 명 수준이었다. 40배 증가한 셈이다. 특히 여름 휴가철, 대피소는 탐방객으로 붐빈다. “산을 알고 등산하는 이는 20%도 안 될 만큼 적어요. 몇 년 전엔 파라솔을 쓰고 높은 구두를 신고 노고단을 올라오는 여자분을 봤어요. 결국 구두굽도 부러져 절뚝거리면서 집에 갔지요. 30년 산꾼의 눈으로 보면 산은, 자연은 절대로 정복 대상이 아니에요.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하는 대상이죠.”

밤새 술 먹고 다음날 못 일어나는 사람, 바위 위에 소변 누다 떨어져 다리 부러져 병원에 실려간 사람, 등산용품만 번지르르하고 산을 오르려는 마음가짐은 없는 사람, 통제 장소에 못 들어가게 하면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면서 흥분하는 사람 등은 ‘꼴불견족’에 속한다.

노고단 대피소를 떠나 치밭목산장으로 향했다. 치밭목의 들머리인 산청 유평리 대원사 계곡에서 치밭목까지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르고 좁은데다 눈이 무릎 위까지 쌓인 곳도 있어 유평리에서 6시간 만에 치밭목에 도착했다. 지리산 주능선의 마지막 산장이 있는 곳이다. 취나물 군락이 많던 고개라 해서 이름 붙여진 치밭목은 천왕봉의 남서쪽, 고도 1427m에 있다. 이곳은 한겨울에 영하 17도까지 내려간다. 지리산에서 가장 매서운 바람이 지나간다. 이곳 산장은 수용 인원이 40명이다. 작지만 취사장·매점·창고·숙소 등 없는 게 없다. 온돌이 들어오지 않아 산장 안은 조금 추운 게 사실이지만, 이만큼 정감 있고 운치 있는 산장을 찾기도 힘들다.

바쁘게 눈을 치고 있던 치밭목산장 주인 민병태(52)씨를 만났다. “정말 춥다”는 말을 건네자, 그는 대뜸 “오뉴월 날씨인데 뭐가 춥다고 그러는 거냐”라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들어오소.” 민씨가 따뜻한 일회용 커피를 내밀며 산장 안쪽의 매점 겸 사무실로 안내한다. 재빠르게 가스버너 2개를 켜 방 공기를 훈훈하게 만든다. 안쪽의 방을 살짝 보니 동계용 침낭, 그 옆에 빼곡히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경상남도 진주 출신인 그가 처음 지리산에 들어온 것은 86년.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리산을 밥 먹듯이 올랐다는 그는 대학 졸업 뒤 잠시 공장을 운영하다 결혼한 뒤 아내 정현숙(47)과 함께 당시 관리인도 없이 방치되던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첫딸을 임신한 뒤 진주로 내려갔다. 이곳을 새로 정비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그는 일부 등산객들을 “안전불감증에 걸린 자살특공대”라고 불렀다. 산행에 필수용품인 물과 랜턴도 가져오지 않아 길을 헤매다 탈수로 조난신고를 해 구조를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처음 산에 들어왔던 때만 해도 다들 제 살 방법은 다 아는 사람들이었어. 괴나리봇짐에 군용복장, 지금이면 줘도 안 입는 것이 최고였던 시절이었지. 장비는 지금보다 빈약했지만 적어도 산을 무서워하고 겁낼 줄은 알았거든. 추우면 장작 모아다가 불이라도 땔 줄 알았다고.”

산행이 점점 속도전이 되면서 산을 느끼고 즐기기보다는 남보다 빨리 가는 게 중요하게 됐단다. “속도가 빨라지니까 장비와 짐이 줄었지. 악천후와 위급한 상황에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곧바로 사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산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 못할 일이 많이 벌어져. 베테랑들도 조난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초보는 어떻겠어.” 그도 그럴 것이 70년대 지리산 종주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1주일이었다. 지금은 2박3일, 1박2일, 또는 하루 만에 종주까지 가능해졌다. “정상 가봤자 재미도 없어. 차라리 계곡에 발 담그고 편안히 산의 모습을 감상하는 게 더 낫지. 산이 어딜 도망가기라도 하나.”

한 해의 마지막 날 산사람들이 모인다

사람이 없을 땐 1주일 동안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 지난 겨울 작업을 하다 오른쪽 다리를 삐었을 때도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끙끙대며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절대고독 속에서 그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이곳에 앉아서 사흘이고 나흘이고 이 앞 능선을 바라보곤 해. 빛의 각도에 따라 신비하게 능선이 살아 숨쉬곤 하지.” 그렇게 몇날 며칠을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산의 겉모습을 넘어 살아 숨쉬는 산의 속살을 그는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산장이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저 멀리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보일 정도로 호젓하고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산장인 만큼 밤이면 차 한 잔 주고받는 사이 대화와 정이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은 매년 12월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면 근처 진주에서 산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한 해를 차분히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고개를 들었다. 열 손가락으로 별의 개수를 모두 셀 수 있는 서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별잔치가 펼쳐져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 발아래에서 오롯이 20년을 지켜온 산쟁이 민씨에게 저 별은 친구이리라.



산장, 치열한 생존의 현장

혹독한 날씨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이어가는 ‘생태적 삶’

산의 낭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산장이다. 등산객들은 한 번 방문하는 곳이지만, 산지기들에게는 엄연한 생활공간이자 생존의 터전이다. 본래 산장은 쉬어가는 쉼터라기보다는 안전을 대비하는 대피소다. 우리나라의 산장은 현재 20여 곳에 이른다. 지리산의 노고단·치밭목을 비롯해 뱀사골산장·피아골산장·벽소령대피소·연하천산장·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로터리대피소 등 9곳, 설악산의 대청대피소·희운각·비선대산장, 오대산의 노인봉산장·오대산장, 덕유산의 향적봉대피소·삿갓재대피소 등이 대표적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계룡산·금정산·북한산 등 여러 명산에 많은 산장이 있었지만, 탐방 문화와 등산 방식이 변하면서 산장들도 자연스럽게 통폐합되거나 정리됐다. 일부 산장은 산림을 훼손한다는 논란도 있었다. 최근엔 국립공원을 비롯한 행정기관이 나서 산장을 인수·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유지·관리 비용 등 여러 가지 부담이 제기되면서 정부가 관리하게 된 것이다. 다만, 지리산 치밭목산장처럼 행정기관이 인수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될 경우에만 민간에서 관리하고 있다.
산장을 관리하는 대피소 직원이나 산장지기들의 생활은 낭만과도 또 다른 생존의 현장이다. 최전방 초소 근무 뺨칠 정도로 녹록지 않다. 겨울이 되면 영하 20도는 기본이고 보름 이상 비구름에 가려 햇빛을 못 볼 때도 있다. 물론 사시사철 절기가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저 멀리 발아래의 산 밑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물이 부족해 씻는 것도 호사스러울 때가 많고 먹는 것도 지고 올라온 것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신선한 과일이나 육류가 항상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주거나 남기고 간 것은 고마운 식량이 된다. 어쩔 수 없는 생활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산장지기의 생활이야말로 가장 생태적이고 환경적이다. 지내는 공간 자체가 에너지나 자원을 소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특히 90년대 후반부터는 국립공원이나 산림의 관리에서 생태적 가치가 최우선이 되면서 산장에 과도한 시설이나 시스템 설치를 자제하거나 최소화하는 분위기다.
그래도 아직까지 산이 좋고, 국립공원이 좋아서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는 산장지기들은 여전히 산을 지킨다. 이들이 있기에 수백만의 등산객들은 지리산과 설악산을 즐겁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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